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김 순 배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클래식을 좋아하세요?’ 누군가를 만나면 한번 쯤 던져볼 수도 있는 평이한 이 질문은 그러나 ‘성서와 문화’에 연재했던 제 어설픈 글발들을 모아 펴낸 책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벌써 오래 전 우리의 박영배 목사님께서 어줍지 않은 글 솜씨 밖에 없는 제게 성서와 문화 독자들께 편지를 쓰듯 음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 번 풀어보라는 권유의 말씀이 시작이었지요. 이후 지금까지 서른 세편의 편지가 독자여러분을 찾아갔습니다.
기억을 더듬듯 제가 토해냈던 생각들을 한 번 되새겨봅니다. 처음에는 음악이 과연 순수한가? 혹은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무엇인가? 와 같이 음악의 본질을 둘러싼 생각들을 끄집어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스스로 그동안 궁금해 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보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음악이란 과연 삶의 제반 조건들을 초월하거나 추월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와 같은 원초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것들로부터 본질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것 너머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지요. 음악과 언어의 상관관계는 새삼 파헤쳐보니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구요.
음악편지를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저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몸담았던 삶의 현장을 벗어나 다소의 거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그곳에서 경험했던 음악생각들이 편지 속에 들어가게 되더군요.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던 어느 봄날 제게 중세의 방랑하던 수도사 ‘골리아드의 노래’가 다가왔고 피아니스트 리히터(Richter)를 다룬 비디오를 보며 음악가들이 지녔던 고뇌를 연쇄적으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동굴의 벽화를 보는 순간 문득 그것들이 움직이며 다가오듯 오래 전 만들어진 음악이 어찌하여 현재에도 우리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탄이 이어지게 되지요. 아마도 조금은 여유로웠던 그곳 환경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글들 같습니다. 크로스오버나 퓨전이 가히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21세기에 음악이 지향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에 까지 생각은 꼬리를 물었으니까요.

다시 돌아온 서울의 가을에서는 라벨과 슈만 그리고 쇼팽이 대세더군요. 물론 제 생각 속에서이지요.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만든 라벨의 현란하고도 투명한 음악세계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만주의자의 길을 힘겹고 쓸쓸하게 걸어간 슈만의 고독 그리고 향수와 동경이라는 복합적 심층심리에 시달리다가 기어이 몸까지 상해버린 쇼팽. 그들의 음악은 아름다움과 처연함의 극치를 들려줍니다.
겨울의 입구에 들어서자 예외 없이 브람스가 찾아왔습니다. 가열한 삶의 고뇌 속에서 무수히 흔들렸지만 끝까지 꿋꿋했던 한 예술가 말입니다. 그가 만든 ‘독일 레퀴엠’은 노래를 못하는 제가 유학시절 어찌어찌 대학의 콘서트 콰이어 단원이 되어 두툼한 악보를 들고 열심히 연습하며 공연까지 했던 곡 중의 하나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됩니다. 브람스는 진정 형식과 내용사이의 균형 잡기에 성공한 드문 작곡가 중 하나이지만 레퀴엠의 내용 자체도 현세의 위로와 내세의 갈망을 아름답게 조화시킨 가사와 곡조가 너무도 빼어난 걸작입니다.
독일 레퀴엠에 필적할만한 ‘프렌치 레퀴엠’의 작자는 포레이지요. 그의 레퀴엠에 얽힌 사상은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크더군요. 어떤 제도나 관행에 무비판적으로 함몰될 수 있는 교회 시스템을 향한 음악적 항의라고도 볼 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한 겨울 드디어 메시앙을 만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선으로 예수 탄생을 바라보는 한 영험한 작곡가를.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인 작품이지요. 20세기 음악계의 그리고 제 개인에게도 하나의 분수령(分水嶺)이 되어준 작품이니까 말입니다. 그 시절 저는 음악적으로 메시앙의 찬란한 음향의 세계와 이른바 미니멀리즘의 단조로운 흑백 톤의 경계를 무시로 오가고 있었던 듯합니다.

음악편지는 또 ‘그들, 즉 작곡가들의 사생활’에도 접근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대체로 큰 사건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속으로는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용암과도 같은 파토스를 내장한 채 한 시대를 걸어갔던 베토벤과 수시로 겪어야 했던 피붙이들의 죽음을 통해 고통과 시련도 신의 뜻이라는 철저한 자각의 자리에 나아갔던 바흐선생 그리고 당대의 명인 괴테에게 예술적 순정을 무한히 바쳤던 한 수줍은 낭만주의자 슈베르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상과 내면은 일련의 안타까움과 통증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예술가의 초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조국의 웅혼한 자연과 한 여자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채색했던 그리그, 부득이 등진 고국을 가슴 아프게 그리워하며 망명 이후 20여 년 간 절필했던 러시아 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를 비롯 작곡가이자 천재적 수학자이며 화가였던 쇤베르크와 가장 국지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명제를 온 몸으로 구현한 누에보 탱고의 창시자 피아졸라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 삶의 역정은 그들의 음악을 한층 더 잘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어줍니다.
또 어떤 독자들께는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었던 주제가 되었을 수 있지만 니체,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과 음악의 상관관계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던 바그너의 존재 같은 것도 흥미롭다면 꽤나 흥미로운 그림이었습니다.

편지의 일부는 저의 개인적인 행사 참여나 교류기 및 감상평에 할애되기도 했지요. 특히 백건우 선생과의 만남은 아직도 깊은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고 그분이 세 명의 떠오르는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가진 앙상블 무대는 아마도 전무후무한 형태의 연주회로 기록될 것입니다. 더불어 제주 국제 관악제나 통영 윤이상 음악제 그리고 불가리아 바르나 훼스티발 참여기는 제 음악적 지평을 훌쩍 넓혀준 영양가 있는 이벤트들이었음을 편지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이켜보면 매우 잡다한 주제들이 편지 속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연대순으로 음악가들을 정렬하지도 않았고 어떤 계보나 경향들로 그들을 분류하거나 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음악편지 속에는 꿈과 현실, 삶의 희로애락, 나아가서 존재의 모순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음악가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것에 투영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철이 바뀔 때마다 게으르고 나태한 전공자가 반드시 한 번은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을 하게끔 독려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 덕분에 자책과 회한과 성찰의 와중에 위로와 초월의 순간을 궁극적으로 선사하는 음악의 신묘함에 대한 재확인이 가능했습니다. ‘클래식을 좋아하세요?’라는 단순한 제목 속에는 이 같은 시간의 흐름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새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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