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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자연화, 자연의 역사화

성서와 문화 2010.10.03 10:41 조회 수 : 2467

김 경 재 ·신학

 

 

법자연과 구원사의 이중주

 

가을이 왔다. 여름 한낮의 열기를 피해 바닷가와 계곡으로 피서지 행렬이 아직 계속되던 무렵,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7일씩 전후하여 벽에 걸린 달력은 각각 입추(立秋)와 처서(處暑)를 작은 글씨체로 가리켰다. 고물이 된 녹슬고 빛바랜 유성기를 볼 때 감정처럼, 이제 음력 절후표는 시대착오적인 맞지 않는 역서(曆書)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데, 입추를 알리는 TV. 영상물을 제작한 기자들은 영글어 고개 숙인 벼·조·수수를 보여주고 빨간 고추와 주렁주렁 수세미를 보여주니, 가을이 오지 않았다고 우길 수도 없다. 대자연의 말없는 사철 변화와 엄숙한 운행질서에 금방 도시의 젊은 지식인은 기가 죽는다.
사람 나이 환갑을 지나면, 서서히 대자연의 엄정한 실재 앞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고희가 지나면 대자연이 더욱더 가깝게 느껴지고€ 흙집과 원목가구가 몸에 더 가깝게 와 닿는다. 나의 몸뚱이와 오장육부를 만들어준 근본 모태 대지에로 귀환 할 시간이 가까워오기 때문이리라.€
동양의 인간이해는 근본적으로 ‘대자연’의 바탕 위에서 모든 것을 논하니까 위에서 말한 60-70세 삶의 관조가 자연스럽게 비행기의 연착륙과 같다. 동양사상 특히 중국사상의 두 기둥인 유교와 노장사상에서 보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실 동양문화란 ‘역사의 자연화’가 그 기조음(基調音)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라고 하는 인간의지의 창조적 활동이나 문명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구조 속에서 ‘성주괴공’(成住壞空) 리듬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유목생활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서구문화는 ‘자연의 역사화’가 그 기조음 이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그렇다고 보여진다. 성경도 인간의 본질은 흙에서 취함 받은 것, 곧 그 뿌리와 원천은 자연에 속한 것임을 애써 강조하지만, 흙으로 빚어 만든 육체 속에 창조주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고,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해 왔다. 뿐만 아니라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삼라만물은 대자연의 ‘반복적 순환운동’이 아니라, 생명은 ‘되풀이 되면서도 자람이며’, 이전엔 없던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창조적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어 가는 ‘구원사’로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중요한 중심축이 되었던 서양문명은 ‘자연’은 ‘역사’에 징집 당하고, 역사창조의 소재물(素材物)이 되었고, 기껏해야 역사의 드라마가 연출되는 무대가 될 뿐이었다.

 

 

자연과 역사의 통전(統全)

 

나는 동양문화의 풍토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땐 농부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시외 변두리에 마련한 논밭에 어머니를 따라 나가서, 흙 속에 근거를 두고 씨 뿌리고, 자라고 열매거두는 자연의 생태적 리듬을 경험하고 자랐다. 사계(四季)의 뚜렷하고도 장엄한 수채화의 아름다움에 늘 감사하고 찬탄하며 자랐다. 말하자면 ‘역사의 자연화’가 철저하게 숙성된 정신문화의 밥을 먹고 자라난 셈이다. 그러다가, 20대 청년기에 성경을 접하게 되고 서구신학과 철학을 접하면서 50년 가까이 ‘자연의 역사화’가 철저하게 이뤄진 빵을 먹으면서 지냈다.
철이 조금 들면서, 자연과 역사가 서로 자기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줄다리기 사이에 끼어있는 신세임을 느끼게 되었다. ‘역사’의 의미를 아예 무시하는 동양문화에도 불만이고, 자연을 정신과 대립물로 보는 서양문화도 수긍 할 수 없었다. 이런 딜렘마 속에서 고민하는 나를 새로운 창발적 사고에로 그 양자를 통전하고 승화시키는 눈을 열어준 지성적 지혜는 의외로 자연과학에서 왔다.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 샤르뎅,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 그런 분들이었다. 우리나라 석학으로서 장공 김재준, 신천 함석헌, 장회익 선생의 좋은 책 『삶과 온 생명』 등은 일방적인 ‘역사의 자연화’ 혹은 ‘자연의 역사화’가 한쪽으로만 치우친 반쪽 진실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연못바닥 오물과 흙이 섞여 삭은 진흙 벌 속에 연근(蓮根)이 뿌리내리고, 출렁거리는 물결 따라 요동치면서도, 수면 위로 아름다운 연꽃을 피어 아름다움과 향기를 발하는 연꽃 이치와 같다. 진흙 벌, 흐르는 물결 속에 바르게 선 줄기, 연당을 온통 덮은 잎들, 그리고 마침내 피어난 연꽃, 그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 있는 실재와 현상들이 아니다. 꽃피워 향기 발하고 열매 맺는 것이 ‘역사’라면 그것을 그리되게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이다.
35억년 동안 자연의 생명 진화과정 속에서 그 자연실재를 바탕으로 연꽃처럼 피어난 ‘정신’이라고 부르는 정신현상이 아주 최근에 창발 하였다. 개인이 개체로서 ‘자기의식화’하여 주체적 인격체로서 자각 할 뿐 아니라, 삶의 전체과정을 관조하고 우주전체를 관통하는 ‘자기초월능력’을 지닌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말하면 영성이다. 그 영성은 우주를 가득 채우는 충만한 에너지와 어떤 뜻의 ‘사랑’이라고 느낀다. 장공 김재준 목사가 83세 되던 어느 가을날, 음악가 박재훈 박사와 함께 캐나다의 대자연을 풍류객처럼 여행하다가 읊은 ‘새벽 날개 타고’ 라는 명상 찬양시 속에서 ‘자연과 역사의 통전’을 느낀다. 소금 유동식 선생도 장공의 그 시를 주목하여 깊이 해설하신 바 있다.

 

 

찬양시 「새벽 날개 타고」 음미

 

이 우주는 하느님 집€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의 집
새벽날개 햇빛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서 내 고향 마련하네 .

 

이 눈이 하늘 보아 푸름이 몸에 배고
이 마음 밝고 맑아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 날개 햇빛 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 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땅에서 소임 받아 주님 나라 섬기다가
주님오라 하실 때에 주님 품에 옮기나니
새벽 날개 햇빛타고 하늘 저편 가더라도
천부님 거기계셔 내 고향 마련하네.
(김재준 전집, 제17권,49-50)

 

 

후렴처럼 반복되는 구절을 단락으로 하여 세절로 된 길지 않는 종교시이다. 장공은 전통적으로 말하는 천국과 지상세계, 형이상학계와 형이하학계, 이데아 본질계와 시공간 현상계, 영성세계와 시공세계, 하늘과 땅,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간에 그것들 상호관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종교·철학·문학예술·과학사상을 부정한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차원을 달리할 뿐 ‘이 우주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것이다. 창공의 푸르름이 몸에 스며들고, 마음은 밝고 맑아져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참 삶이다. 자유인으로서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 곧 생명·정의·평화·사랑에 소임 받아 일하다가 더 높은 차원의 생명질서 안에 들어가서 안기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장공의 명상시에서, 자연과 역사는 상호 갈등을 그치고, ‘범우주적 공동체’의 씨줄과 날줄임을 깨닫는다.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셨다고 전도서는 말한다. 올해의 가을도 아름답게 향유하고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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