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0년 성서와 문화

[박 영 배 ·본지 편집인]

 


난곡 조향록(趙香綠) 목사님과의 첫 만남은 1950년대 후반 자하문 밖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가진 선린회(善隣會) 하기 모임에서였다고 기억된다. 이 무렵 십오육명의 대학생 모임이었던 선린회는 주로 강원용 목사님과 조향록 목사님께서 지도해주셨다.
두 분의 지도력은 각자 그 개성과 특성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강 목사님이 분석적이며 논리적인 양의사(洋醫師)와 같은 분이라면, 조 목사님은 직관적이며 전체적인 한의사(韓醫師)와 같은 분이었다. 강 목사님이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형이라면 조 목사님은 젊은이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는 형이었다.
모임의 순서는 2박3일 동안 두 분의 강의를 듣고 밤늦도록 질문하고 토론하며 각자가 살아 온 발자취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당시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고민하며 하시는 두 분의 말씀과 멋에 흠뻑 빠져있었다.
말씀의 골격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민족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나라 사랑, 이웃의 행복, 사회정의, 역사의식, 소명, 복종, 순결, 무사(無私), 사랑, 친구간의 신의와 우애 등의 주제와 어휘들 속에 들어있는 그 엄청난 속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말씀에 모두가 감복하며 수용했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몸은 몹시 힘들고 피곤해도 마음은 늘 흡족하고 희망에 차 있었다.
사실 50년대 후반 전쟁 이후의 우리 사회는 말할 수 없이 황폐하고 피폐한 현실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80불 전후이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다. 우리사회 어느 구석을 보아도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어려운 시절에 두 목사님의 지도력과 선린회 친구들의 우정에 힘입어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갖고 젊은 시절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생각한다.

 

난곡 조향록 목사님은 지난 봄 향년 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홀연히 한시대가 훌쩍 지나가는듯하다. 실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이란 때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전도서 3:1-2)는 전도서의 말씀을 절감하게 한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세상과 갈등이 많은 우리 사회에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드러남을 보며 그 허전함과 애석함을 금할 길이 없다.
시인 황금찬 선생은 ‘초동교회와 나’ 라는 글에서 목사님의 사람됨을 표현하여 ‘목사님은 천년의 우정을 어느 때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가슴을 느끼게 하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조 목사님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언제나 지극한 마음과 진실한 가슴을 느끼게 하는 분이다. 특별히 후배들과 제자들에게는 각별한 애정과 정성으로 대하신다.

 

60년대 중반 나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가난한 유학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학교 강의실과, 도서관, 교내식당 그리고 기숙사 정도였다. 그러기에 그 곳에서는 전화를 할 데도 없거니와 올 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 나에게 사무직원이 와서 어디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있는 나에게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하는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전화를 받고 보니 뜻밖에도 조 목사님이었다.  순간 막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가웠다. 일본의 어느 교회와 자매관계로 오신 길에 나를 찾은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시간에 교토의 번화가 가와라마찌에 있는 중국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시간에 그 곳에 가니 목사님께서 미리와 계시며 목사님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너무나 반가운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 간의 온갖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푸짐한 요리가 나왔다. 오랜만에 마음껏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유학생 생활에서 오는 모든 시름을 날려 보내는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목사님께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대접하는 관습은 우리가 젊은 시절에도 그러하였지만 90에 이른 말년에도 후배 대접하기는 여전하셨다. 간혹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목사님 댁을 방문하면 언제나 집 가까이에 있는 보신탕집에 가서 우리를 대접해 주셨다. 한번은 목사님께서 위독하셔서 중환자실에서 무려 3주간이나 사경을 헤메시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셔서 집에 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김용기 교수와 여상환선생과 함께 목사님 댁을 찾았다. 그날도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점심을 손수 마련하셔서 대접해주셨다. 이 날 목사님께서는 여러 말씀을 하셨다. 특별히 구약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꿈을 우리의 현실 역사와 연결해서 말씀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아름다운 꿈과 희망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루어지지 않을 지라도 그 것을 희망하며 후대에 전승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만남이 목사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인간의 유한함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목사님은 그 성품이 후덕하실 뿐 아니라 인문학적인 지식에 깊은 조애를 가지셨기에 그 주변에 많은 사람이 초동교회에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우리 시대의 걸출한 시인 박목월 선생과 황금찬 선생, 극작가 주태익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젊은 예술가들과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여러 집단의 사람들도 있었다.
조 목사님의 외모는 얼핏  보면 시골 농사꾼 같은 소탈한 모습이지만, 그 하시는 말씀과 표정, 그 마음 씀씀이와 도량이 한 시대를 능히 품는듯한 지사다운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목사님의 신념과 인격에서 태산 같은 시련과 해일 같은 풍랑을 견디며 극복하고 살아오신 강인한 신앙과 투지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조 목사님은 자전적인 “80자술”에서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복음전파자가 된다는 것을 내 운명처럼 믿고 순종해 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직을 하나님이 주신 천직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큰 축복이며, 은혜이며, 선물로 여기며 일생동안 헌신하셨다. 그러기에 조 목사님은 스스로 목사직을 인생 최고의 영광의 자리로 믿고 살았으며 평생을 거의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교회를 위해 살았다. 그는 또 성서 속에서 우리의 역사와 우주를 보며, 우리의 역사와 우주 속에 말씀하시는 성서를 보려 했다.
조 목사님은 교회와 목사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즉 민중들의 모든 과오를 짊어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 속죄를 위해 하느님 앞에 간구한 제사장과 민중들의 불신앙과 윤리적 타락을 경고하며 그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밝힌 예언자의 자리가 곧 교회와 목사의 자리임을 알았다.
조 목사님은 젊은 시절 풍산교회 전도사로 시작하여 신사동 교회를 섬겼으며, 1954년부터 초동교회에서 평생의 목회생활을 꽃피었다. 그러나 목사님의 목회는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산 시대와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뛰어가서 수고와 헌신을 다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해방공간에는 기독교 청년연합회에 참여하여 임정요인들의 환영회를 주도하며, 6.25전란 시에는 잃었던 수도 서울이 우리의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자 정부 공보처의 요청으로 38선을 넘어 이북 5도민을 위한 위문 사절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피난길에서는 경남 진영에서 한얼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하며, 60년대 초에는 당시 봄마다 농촌에서는 먹을 양식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을 돕기 위하여 기독교 청년동지회 주관으로 전국 기아 대책협의회를 구성하여 구호사업에 앞장서는 한편 서울시내에 약 2천명에 이르는 넉마주이 청년들의 선도 사업 위원장으로도 활약 했다. 그리고 70년대 유신체재 하에서는 매일같이 학원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시대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수고하였으며, 한국기독교 장로회 교단의 오랜 숙원인 종합대학인 한신대학을 설립하는데 산파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방송위원회 심의위원장과 재단 법인 전국 재해대책위원회 실행위원장 및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연세대학교 재단이사로도 수고했다. 80년대 말에는 현대사회연구소 이사장과 세종연구소 이사로, 말년에는 주로 범종단 남북교류추진협의회 회장과 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회의 종교분과 위원장 및 통일원 고문으로 수고하셨다.
그의 한 평생은 목사로서 또 교육자로써, 때로는 농촌 운동가와 사회 활동가로써 나라와 사회를 위해 쉼 없이 참여하고 봉사하는 생애였다.
조 목사님은 스스로 80자술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때와 자리가 없었고 그에 따라 나는 다만 목사의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로 목사님의 목회 영역은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대상이었으며, 이 나라 전체가 그의 교구였다.
바울이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다.”(로마서 3:9)는 애끓는 애국의 심정을 일생동안 본받아 사신 생애였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위대한 스승을 그가 살아있는 생전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한 100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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