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9년 성서와 문화

대지(大地)의 은총(恩寵)

성서와문화 2009.12.28 16:35 조회 수 : 1704

 
[ 작성자 : 허 영 수 - 소설가 ]


5월 초순 총영사관으로 초대장이 왔다. 봄도 돌아왔으니 목장에서 야유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간곡한 연락이 왔다. 아무 부담이 없는 순수한 초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총영사를 비롯해 부부 동반으로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삿포로(札幌)에서 치도세(千歲)로 향하였다.
한 시간쯤 달리니 아침 햇살이 은령(銀鈴)을 붉게 물들이고, 산 중허리에 홍산앵(洪山櫻); (장미과의 산벗나무의 일종, 일본 중부 이북에서 북해도에 걸쳐 분포. 꽃은 잎이 봉오리 잎이 싹틀 때 핀다. 크고 색도 짙다.)이 붉은 피를 쏟고 있다. 차창을 통하여 보이는 것은 완만한 내리막 화산(火山)성 대지가 넓은 아름다운 고원을 이루고 목초(牧草)지, 숲, 계곡을 이루고 있다.
드디어 쿠로자와(黑澤) 목장 가까이 오니 어렴풋이 넓은 초원 언덕에 세워진 2층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젖소들의 목사(牧舍)는 숲과 호수에 싸여 있으나 주변은 넓은 초원(草原)이었다. 인기척이 없이 매우 고요했다.
호면 저쪽 먼 곳까지 은색이었다. 갑자기 호면에 솜뭉치 같은 것이 여러 개 나타났다. 호수 위를 춤추는 백조 떼였다. 잔물결에 흔들리면서 유유히 떠다닌다. 그 뿐 아니다. 오리와 작은 물새 떼들이 합류해 왔다. 비단벌레의 날개처럼 광선의 방향을 따라 녹색으로 자주 빛으로 색깔을 바꾼다.
黑澤牧場이란 현판이 아치형 지붕에 붙은 목장 문을 들어서니 서부영화에서나 본 카우보이가 쓰는 창 넓은 모자를 쓴 쿠로자와 씨가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마중한다. 우리들은 주인의 안내를 받아 호숫가 큰 노송나무(檜) 밑, 벤치로 갔다. 잔디밭을 곱게 손질해 두었다. 칭찬을 했더니 “손볼 기간이 없어 묵혀 둔 것을 오늘 새벽에 제가 손질했습니다.” 역시 청바지에 앞치마를 두른 부인과 작업복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외동딸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인사를 한다. 이들은 모두가 노동자다. 복장은 서양 농민 스타일인데 손님에게 인사하는 것은 일본식으로 정중하고 지루하다.
나무 밑 테이불에 쿠로자와 세 가족이 열심히 갖다 날라 온 칭기즈칸 요리와 와인을 먹고 목사와 목초(牧草)지로 갔다. 목초지를 바라보는 쿠로자와 씨는 대지(大地)가 지닌 풍부한 힘에 싸여 존재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얼굴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목초를 가꾸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우렸나 싶어 나는 위로하는 말을 했다.
“식물은 거짓을 모르니 노력하신 만큼 보답이 올 것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정성을 다 하고 노력해도, 농부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대지의 은총이 없으면……”
나는 이 말씀에 숙연해 졌다. 27년 전에 들은 ‘대지의 은총’이란 이 말은, 오늘도 내 귓전에 맴돈다.

 

도시에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대지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현대는 대중매체로 무수한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어느 쪽을 향해서 내가 가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나의 하루 생활도 돌아보면, 아침에 일어나서 불쾌한 신문을 읽고, 원고를 쓰고 정리하다 보면, 밖에는 비가 오는 지, 눈이 오는 지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고 말 때가 종종 있다. 생활이 더욱 산업화되어 모든 것이 단순한 사회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최근 젊은이들은 주체성을 잃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분위기만 좋은 공간을 찾아 편안함만 구한다는 비판을 듣는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선진국 젊은이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생활의 간접화(물건 생산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가 된데 원인이 있다. 이것이 ‘대지의 은총’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며, ‘대지의 은총’에 의하여 인간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된다.
우리가 돌아올 직전에 목장 풀밭에서 젖소가 새끼를 낳았다. 쿠로자와 내외가 바구니에 넣어 우사(牛舍)로 옮긴다. 인간들은 휴일이 있어도 자연은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때, 나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 목장에서 소들은 해가 솟으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우사로 돌아간다. 자연의 생활은 하루의 시간에 딱 맞게 짜여 있다. 시간 뿐 아니라 계절도 생활·노동도 같은 천에 짜여 진 모양과 같다. 그래서 생산이란 대지의 사이클에 모든 것이 조화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분명히 제 맘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대지의 사이클에 따르면 다른데서 맛 볼 수 없는 청량(淸凉)감과 차분함과 충실함이 온 몸을 감싼다.

 

삿포로에 돌아와서는 한가할 시간이 없다. 암담(暗澹)한 생각이 들었으나 석양빛에 물 들은 붉은 목장의 언덕을 떠올리니 조금은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5 사랑하는 능력 성서와문화 2009.12.28 1836
44 시를 쓰는 마음 (11) 시나이 반도를 지나며 성서와문화 2009.12.28 1712
43 신(神)의 저울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646
42 다석(多夕) 유영모의 비정통적 기독교 -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성서와문화 2009.12.28 1837
41 퇴계와 율곡 성서와문화 2009.12.28 1840
40 음악 片紙 ⅢⅩⅡ 형식인가 내용인가?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599
39 섬진강 물방울 이야기 성서와문화 2009.12.28 1736
38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 성서와문화 2009.12.28 1764
» 대지(大地)의 은총(恩寵)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704
36 소금(素琴) 유동식 선생의 신학세계는 오악(五嶽) 중 금강산 성서와문화 2009.12.28 1730
35 제3 교회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694
34 예술과 신앙 - 4번째 성서와 문화 미술동인전에 부쳐 - 성서와문화 2009.12.28 1560
33 시를 쓰는 마음 (10) 허수아비의 눈물 성서와문화 2009.12.28 1598
32 수고동지(受苦同志)의 실존과 새 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576
31 무종교인(無宗敎人)의 변(辯) 성서와문화 2009.12.28 1503
30 창조신앙과 기독교 환경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523
29 내가 만난 도예도인(陶藝道人) 이종수(李鍾秀) 선생 성서와문화 2009.12.28 1558
28 음악 片紙 ⅢⅩⅠ 고정관념에 대하여 성서와문화 2009.12.28 1572
27 추억의 예하재 복수초 성서와문화 2009.12.28 1657
26 탈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 평화사상가, 함석헌 성서와문화 2009.12.28 1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