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9년 성서와 문화

시를 쓰는 마음 (10) 허수아비의 눈물

성서와문화 2009.12.28 16:31 조회 수 : 1605

 
[ 작성자 : 임 인 진 - 시인 ]

 
푸른 새벽에 창을 열었습니다. 동녘 하늘에 희미한 별 하나 외롭게 깜박이다가 눈 깜작할 사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풀벌레소리 또그르르 풀잎에 이슬방울 구르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한여름 기세등등하게 뻗쳐오르던 풀잎들이 어느덧 제풀에 기죽은 것 같습니다. 꽃 피우고 열매 맺어 여물리느라 신명을 다 바친 모습이 어찌 저리도 신산(辛酸)하게 보일까요.
마디마디 흩어져서 사그라지겠지요. 한낱 아쉬움도 후회도 없이 소멸로 향하는 발걸음, 그 절정(絶頂)의 시간을 그리도 초연히 마무리할 수 있는지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초목의 기(氣)가 빠져나가듯 사람의 가슴도 덩달아 휑뎅그렁하게 허허로워짐은 자연이 일깨우는 철리(哲理)인 것 같습니다.

 

이맘때면 언제나 고향마을을 그려보게 됩니다. 논두렁 밭두렁에 두 팔 벌린 충직한 모습으로 익어가는 곡식을 지키던 허수아비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바람에 찢겨 너풀거리는 누더기 헌 옷자락에 쭈그렁 벙거지 같은 모자 눌러쓴 각설이 거지 행색으로 말입니다. 뻗장 팔다리에 시선은 언제나 먼산바라기였지요.
예전엔 달빛 어슴푸레한 밤에 여기저기서 불쑥 뛰쳐나올 것만 같아 오싹 소름끼치던 허수아비였는데, 요즘엔 마치 연민(憐憫)의 대상처럼 자꾸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허허로운 지평(地平)이라
차마 거역 못한
파수군 임에

 

빛바랜 단벌 옷자락
훼살짓는 비바람에
갈기갈기 찢기어도
여윈 가슴
아픈 팔 다리로
어금니 악물고서

 

알알이 여문 이삭
머리 숙인 들판
풍요(豊饒) 눈부심에

 

순종으로 이룩한 나라
바로 눈앞이라
절로 눈물 솟는답니다.
- 졸시 「허수아비의 눈물」 -

 

허수아비의 상징적 의미를 나름대로 인간 삶의 본질로 다가서는 성실과 인내와 지구력에 비춰보았습니다. 창조적 섭리에 순종하려는 파수군 허수아비가 무슨 유용(有用)의 효율과 가치 같은 것을 따지고 나섰겠습니까. 그의 눈물은 무엇 한 가지도 바라지 않는 그야말로 무상(無償)의 기쁨이 자아내는 감동의 눈물입니다.
유상(有償)의 기쁨을 쫓아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어찌 자유로운 결실,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실용성과 사유화를 위한 욕망의 가치관으로 점철된 현실에서 허수아비는 한낱 허상(虛像)이 아닙니다. 크나큰 감동의 대상입니다.

 

지금쯤 그곳에는 취나물 곤두래 웃자란 줄기 끝에 닥지닥지 붙은 꽃망울들이 상큼한 향기 틔우고 있겠지요.
마른 수염 까칠한 옥수수들이 까치에게 물어뜯긴 이빨들을 누렇게 드러내놓고 서걱거리는 마른 대궁을 벗어나지 못해 몸을 비틀며 안달복달할 것입니다.
줄기 밑둥치까지 사그라져 감자를 심었던 두둑인지 이랑인지 모르게 평평한 흙에 묻혀있는 감자들은 얼마나 가슴 답답할까요. 꼭 움켜쥐고 있어야할 생명줄마저 놓친 잔챙이 감자들은 또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 일손이 모자라 그렇답니다.

 

하현(下弦)달빛 희끄무레 비치는 밤엔 물푸레나무 숲에서 두 눈 부릅뜬 부엉이가 지켜준다던 산간마을, 언젠가는 양철통에 새끼줄 꿰어 절그렁거리며 날것들 쫓더니, 이제는 가시철책도 모자라 전류 흐르는 전선을 설치한다지요. 고추밭에 들어가 볼일 보던 여인이 밭주인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니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 많던 허수아비들 다 어디로 갔을까요. 너덜너덜 해진 헌 누더기 옷에 쭈그렁 벙거지 쓰고 비스듬히 두 팔 벌리고 서서 먼산바라기로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을 공짜로 지켜주던 허수아비, 무상의 기쁨으로 눈물 솟던 우리의 허수아비 정말 그립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5 사랑하는 능력 성서와문화 2009.12.28 1837
44 시를 쓰는 마음 (11) 시나이 반도를 지나며 성서와문화 2009.12.28 1715
43 신(神)의 저울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647
42 다석(多夕) 유영모의 비정통적 기독교 -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성서와문화 2009.12.28 1842
41 퇴계와 율곡 성서와문화 2009.12.28 1856
40 음악 片紙 ⅢⅩⅡ 형식인가 내용인가?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600
39 섬진강 물방울 이야기 성서와문화 2009.12.28 1737
38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 성서와문화 2009.12.28 1770
37 대지(大地)의 은총(恩寵)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710
36 소금(素琴) 유동식 선생의 신학세계는 오악(五嶽) 중 금강산 성서와문화 2009.12.28 1737
35 제3 교회 file 성서와문화 2009.12.28 1697
34 예술과 신앙 - 4번째 성서와 문화 미술동인전에 부쳐 - 성서와문화 2009.12.28 1561
» 시를 쓰는 마음 (10) 허수아비의 눈물 성서와문화 2009.12.28 1605
32 수고동지(受苦同志)의 실존과 새 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577
31 무종교인(無宗敎人)의 변(辯) 성서와문화 2009.12.28 1505
30 창조신앙과 기독교 환경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526
29 내가 만난 도예도인(陶藝道人) 이종수(李鍾秀) 선생 성서와문화 2009.12.28 1562
28 음악 片紙 ⅢⅩⅠ 고정관념에 대하여 성서와문화 2009.12.28 1574
27 추억의 예하재 복수초 성서와문화 2009.12.28 1659
26 탈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 평화사상가, 함석헌 성서와문화 2009.12.28 1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