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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동지(受苦同志)의 실존과 새 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6:30 조회 수 : 1577

 
[ 작성자 : 장 기 홍 - 지질학 ]


우리 집 삽살개는 나이 열일곱쯤 되어 수명이 거의 다 된 것 같다. 가끔 비틀거릴 때가 있는데 그러다가는 쓰러져서 두 발을 허우적이며 땅을 파는 시늉을 한다. 개가 땅을 파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개는 그러다가도 넉넉히 일어서서 살아가기를 벌써 여러 번째 거듭해 왔다. 아마도 죽음의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나이를 먹어도 영원히 살 것 같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에 비하면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도 든다.
며칠 전 나는 대학동기 한 사람으로부터 그가 항암 투병중이며 여러 달 만에 기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여러모로 다행해 보였던 그를 나는 다소간 부러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나보다 여러 면에서 다행해 보였다. 그런 비교가 다 헛것이 아니었던가! 그의 와병 소식은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젊은 학자들도 흔히 요절하여 화제에 오른다. 한 국립대학의 광물학 교수였던 그는 아프리카에서 광산을 보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현지를 답사했다. 그 광산에 다이아몬드가 난다는 것을 알아낸 그는 보수로 우선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주(株)를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병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자세히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여하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나는 지질학자로서 사람뿐 아니라 지구 자체가 유한한 수명을 가졌음을 안다. 우리가 아는 우주도 수명이 있다고들 한다. 먼 훗날에 서서 볼 때 색즉시공(色卽是空) 색불이공(色不異空)은 너무나 명백하다.
노인만이 아니라 제왕이나 필부필부(匹夫匹婦)나 그 누구라도 사람이면 최대의 배움은 ‘앞으로 죽음이 있다’는 자각이겠다. 나이 먹어 가면 곧 죽음이 있을 것도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일상사의 환상을 실상으로 아는 착각은 더 짙어진다.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리기를 연연하게 된다. 나이 들면 전보다 더 ‘죽음을 앞둔 존재’임에 실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착각의 망(網)에 걸려 사는 것을 즐기며 지금껏 살아온 습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 자신을 돌아다본다.
죽음과 친숙해지는 것이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모든 산 것들은 죽음에 있어서 동무요 동료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일컫지만 사(死)야말로 면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 다음으로는 질병이다. 비교적 건강한 사람도 있기는 하나, 사람들에게 어차피 병은 있게 마련이며 누군가가 병을 담당해야 한다. 질병과 죽음은 늘 따라다니는 삶의 필수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라 생각할 때 서로 돌아다보아 자비심(慈悲心)이 없을 수 없다. 고(苦)를 함께 나누는 동지라는 자각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모두 수고동지(受苦同志)라 말해본다.
옛사람들은 사후에 천당에서 보상을 받을 것을 믿는다든지 예수가 말세에 재림하면 의인들을 무덤에서 일으키리라 믿었다. 인도사상에서는 윤회를 믿고 다음 태어날 때를 위해 적선(積善)을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의 조명 아래 사는 우리는 그런 개인적 사후보상은 없음을 알고 있다. 옛날에 있던 도덕의 기반이 무너지고 없음이다. 이제 인류는 극히 고상한 신인류(新人類)가 되어야 세상이 자발적인 윤리사회가 될 수 있다. 성인(聖人)이나 초인(超人)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 어렵기 그지없다. 그런 실현이 가능할까? 현황은 정 반대로 되어가는 감이 있다. 그래도 길은 오직 그 길이 앞에 있을 뿐이다. 거족적 신인류로 거듭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피하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사멸(死滅)을 겪는다. 지구도 태양도 다 수명이 있다. 모든 생물 종(種)에는 수명이 있다. 인류에게도 수명이 있음은 물론이다. 고생물학 서적에는 옛 생물종들의 수명에 대한 연구결과가 도시(圖示)되어 있다. 거기 보면 알려진 과거의 무수한 생물의 생존기간이 일목요연하게 선(線)의 길이로 표시되어 있다. 포유류 종의 평균수명은 200만년 미만임을 알 수 있다. 인류종(Homo sapiens)은 수십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앞으로 살날이 백 수십만 년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백수십만년은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살 경우의 수명이고 지금처럼 인공을 자꾸만 가하면 수명은 단축될 게 뻔하다. 한편 인위적으로 영생을 도모할 것이니 인간의 재주가 비상함에 비추어 보면 어떻게 인조(人造)인간으로 둔갑하여 생존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다. 인류가 어찌어찌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하자. 지구와 태양에 수명이 있으므로 결국은 유한한 존재이다. 물론 너무나 먼 훗날의 일이다. 다만 여기서는 변화가 본질적이라는 것과 그 변화에는 멸망 혹은 사멸이 들어 있음을 상기해볼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망에 얽혀 사는 삶은 죽음을 전제한 삶임을 지적해 볼 뿐이다.
인류의 숙명을 생각하자면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이다. 개인으로는 물론이요 인류 전체로서도 그렇다. 어떤 철학자는 사람을 ‘죽음을 앞둔 존재’라 강조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의 정의(定義)라 보았던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만이 의식적으로 ‘죽음을 앞두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산다. 죽음이 있어서 비로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임을 대견히 여긴다면 죽음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이는 본래 불교의 중심원리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열반과 동의어로 씀으로써 죽음을 옳게 평가해왔던 것이다.
허무주의 같지만 허무라 해서 겁낼 것 없다. 사실이 허무하다면 그것을 깨닫는 일은 허무한 것이 아니고 알찬 일이다. 유한(有限)의 존재인 우리에게 있어 깨달음이야말로 본분(本分)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나가서 연기(緣起)의 이치에로 초점을 옮기면 그것이 깨달음이리라.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인즉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요즘의 환경과 생태계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으라고 대들고 있다. 자연 정복이란 말이 있더니 사람들은 개발을 마구하고 자연을 파괴하여 그만 환경이 파탄 났다. 우리는 이제 ‘나’와 환경을 대립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뉘우치고 ‘나’와 환경이 하나다 하는 이치를 배워야 하게 되었다. 사람과 환경이 생태적인 관계에 있다는 말은 서로 연기(緣起)적이라는 그 뜻이다. 환경이 망하면 인류도 망한다. ‘나’ 없으면 ‘너’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서로 의존적이라는 말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덜 싸우게 되고 서로 선(善)해야 한다는 틀림없는 답이 얻어진다. 깨달음은 바른 선택 바른 결단으로 이어짐이다.
생태라는 연기(緣起)를 여래는 벌써 그 옛날에 지적했던 셈이다. 오늘의 생태적 위기와 절박한 환경문제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산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삶의 토대인 천석(泉石)도 공경해야 한다. 자연보호의 철학이다. 예수가 만일 지금 살아서 가르친다면 사람 서로간은 물론 모든 중생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과 같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절박하게 사람에게 깨달음을 요청하고 있다.
개인으로는 가끔 성인이 되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어도, 국가들이 있는 한 부국강병을 면할 수 없고 걸핏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보듯이 전쟁이 붙으면 짐승처럼 된다. 아니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은 세계대통령 격인데 그가 아무리 휴전을 역설해도 외면하더니 유엔 사무총장은 마침내 성사시키고 말았다. 어서 세계가 한 나라가 되어 모든 개인이 세계시민이 되면 부국강병의 원리는 없어질 것이다. 유엔이 세계정부가 되는 그 날이 오면 신인류로의 큰 걸음이 걸어지리라 기대된다.
미래에는 그런 새로운 윤리가 지배하게 될 것을 꿈꾸어 본다. 어떻게 그런 꿈같은 미래를 만들까 생각할 때 유교와 불교에 있던 무보상의 인생관이 연상된다. 공자는 미래의 보상을 전혀 논하지 않았다.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도 물론이다. 그런 성자들처럼 되어야 하는 것이니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이 사람아, 아무런 보상이 없을 걸세! 애쓰지 말게!” 이렇게 누군가가 내게 충고한다 해도 나는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 했던 그 철인을 따르리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인류의 목숨이 유한한 것은 마치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는 산중에 피었다 슬어지는 꽃밭의 유한(有限)함 같다. 유한하므로 귀중하고 유한하므로 고귀하다. 촌음을 아껴서 한껏 좋게 쓰겠다 하는 자각이 솟을 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아는 상식이 아닌가. 그러니 새 윤리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며 이미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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