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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교인(無宗敎人)의 변(辯)

성서와문화 2009.12.28 16:30 조회 수 : 1505

 
[ 작성자 : 신 옥 진 - 시인 ]


현재 나이 63세. 옛날 같으면 이미 땅속에서 땅 위의 세계에 무심한 채 누워 삭아가고 있을 나이이다. 세상이 바뀌어 수명이 연장되었다고는 하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늘 내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물론 일반인에 비해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그리고 몇 번은 사경을 헤맨 경험의 탓도 있겠지만 ……. 아무래도 사후세계와 제일 관련성이 많은 것이 종교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도 여태껏 내게는 종교가 없다. 종교를 갖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확고한 사상, 신념, 정신적 강인함 혹은 혼자서 버틸 수 있는 달관의 경지든지 그 어떤 것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살아오면서 굳이 종교를 안 가지려고 외면하거나 회피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다. 살다보니 여태껏 종교 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동안 종교를 가지려고 전혀 애를 써보지도 않았던가? 아니다.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젊은 시절엔 나 자신의 얄팍한 지식만 믿는, 교만을 부리기도 했음을 지금은 고백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만도 훑어내 버리고 진정으로 종교에 다가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데도, 생각보다 그리 쉽지가 않다.
젊었을 때는 오로지 맑은 판단과 바른 자세만 견지하면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도 자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생각에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하물며 인간 중에서도 무지몽매한 나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종교에 대한 지식 또한 거의 무지에 가깝고 단조롭기 짝이 없다. 성경이나 불교를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생활 속에서 단편적으로 조금씩 접해본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무종교인의 변’이란 제목 아래 변명을 하기엔 너무나 유치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굳이 글을 쓰는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보편적 의식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 의미가 있다면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수많은 종교 중에 내가 접해본 불교와 기독교에 대해 의견을 펴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불교는 스스로 자기 완성으로 다가가는 쪽이고, 기독교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교리를 따라 자신을 구원해 가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틈틈이 절과 교회 등에 가보았지만, 아직 어느 한쪽으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우선 불교는 산중에 있으므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정작 가보면 입지가 자연 속이라 좋았지만 불경의 공부방법 등이 어렵고 까마득해 보였다. 세속의 현실에 적응해 살면서 자기완성의 정진을 하기엔 현실적으로 실행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다소 그림의 떡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가장 늦을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믿고 다가서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돌아서면 깜박거리는 기억력을 가진 현재의 신체적 상황에서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절 방에 들어앉아 용맹정진하기엔 나이가 너무 무겁고 타이밍이 늦은 것만 같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가? 어릴 적, 가끔씩 크리스마스 때 주위 사람들을 따라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그때는 어려운 시절이라 늘 굶주렸기 때문에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재미 때문이었다. 성장해 가면서는 띄엄띄엄 기웃거린 적이 있을 정도지만 …….
교회에 갔을 때 내가 좋아했던 것은 찬송가를 듣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찬송가를 들으면 마치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의 일렁거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서울서 다니던 직장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돈이 떨어져 며칠간 굶주린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골목의 한 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다. 골목의 집들은 한결같이 오목조목한 가난한 집들이었는데, 때마침 저녁 밥 짓는 연기가 골목에 자욱했다. 그 순간 교회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렴풋한 찬송가를 들으며, 추운 겨울에 언 손으로 눈물을 닦은 적도 있었다. 그것이 나의 서글픈 신세 때문이었는지, 성령이 와 닿아서인지, 아니면 둘 다 합쳐져서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 그 이후로도 나는 늘 찬송가에서 깊은 감동을 받곤 했다. 그러나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우선 장황하게 늘어놓는 어법 자체가 싫었고 그것을 듣고 있는 신도들의 자세 또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교회 안의 분위기가 나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동조음을 내는 신도들이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여겨졌고, 사이비교회 맹신도들을 연상시키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그 뒤부터는 교회를 가더라도 찬송가만 듣고 조용히 혼자서 나오곤 했다. 이런 사연으로 아직 나는 어느 쪽에도 귀의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인생의 황혼녘. 찬밥 더운 밥 따지고 있을 형편이 못 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입원을 하고 대수술을 하고 또 하루걸러 부고장이 날아오고 있다. 어느 순간엔 나 자신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이 도리어 실감이 안 날 때도 있다. 그만큼 세상을 등진 사람이 많고 주위에 온전한 사람도 거의 없다. 이젠 좋든 싫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생의 마감에 대비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나도 어느 쪽이든 정해서 귀의하고 싶은 심정이 절실하다. 어느 종교에라도 귀의해서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동시에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종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라는 말을 따라 무조건 믿으려고 애를 쓴 적도 한때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 이미 지나온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믿음의 지속이 대체 가능하겠는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이해되지 않는 실체를 억지로 믿으려고 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고 힘겨운 문제다. 나는 나름대로 사후의 문제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당면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해 왔다. 한때는 <저쪽 동네>라는 모임을 만들어 죽음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지만 별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유사 이래 인류가 이 문제에 대해 고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규명이나 결과물에는 전혀 진전이 없지 않은가. 간혹 개인적인 경험들을 모든 모은 책들이 사후세계를 증언하고 있지만, 객관성과 체계적인 울림까지는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불확실성의 세계, 삶일진대 종교가 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가.
인류역사상 최고의 성인인 예수와 석가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정도는 지구촌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실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두 성인의 뜻을 전달하는 단체, 조직, 기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손끝을 보지 말고 달 그 자체를 보라는 <원각경>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가끔 나는 두 성인의 훌륭함이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오는 과정에서 본인들의 본의와는 다르게 왜곡되어 현재에 이르지나 않았는지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굴절된 과정이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곧게 수정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낀다. 설령 그것이 개선된다 할지라도 그 무고한 세월 속에 이미 나는 죽음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세월이 흘러도 인간 세상에서 그 문제는 영원히 개선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은 나의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가속을 더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어디에 핀트를 맞추어 내 생의 마감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처음 <성서와 문화>에서 원고청탁이 왔을 때 내가 글을 쓸 곳은 아니라고 생각 했다. 단호히 사양해야 했다. 왜냐하면 글을 쓰기엔 너무 막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졸필을 들기로 결심한 것은 혹시 이런 글을 읽고 누군가가 기적적으로 나에게 지혜로운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바람 하나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글은 누군가에게 앎을 전달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나의 딱한 입장을 솔직히 고백하여 조언을 들을 수 있을 때, 혹시 이 글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종교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포교에 전력을 다하고 있고, 어정쩡한 무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를 향해 이처럼 절실히 다가가고 있는데도 왜 접점이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대체 어떤 문제점이 장애물로 가로놓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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