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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앙과 기독교 환경윤리

성서와문화 2009.12.28 16:29 조회 수 : 1526

 
[ 작성자 : 조 용 훈 - 신학 ]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지구환경위기의 책임이 기독교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자연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창조신앙이 자연의 신성함을 부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듦으로써 자연세계의 지배자가 되게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런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서구에서 산업화가 생겼고, 어쩌면 환경문제란 산업화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서를 깊이 들여다보면, 특히 창조신앙 가운데에는 오늘날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생태학적 통찰이 적지 않다. 성서가 환경윤리의 걸림돌이 아니라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첫째, 창조이야기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에만 관심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하는 신이다. 창조 이야기의 관심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새들도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창 1:22).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과 똑같이 여타의 생물들도 돌보신다. 하나님은 짐승과 새를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의 먹거리에 관심하는 분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창 1:30). 하나님은 홍수심판이 끝난 후 노아와 계약을 맺으실 때, 자연세계와도 함께 언약을 맺으신다. 말하자면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괄하는 ‘우주론적 언약’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8-11)
둘째, 하나님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좋다고 하셨다. 성경은 피조세계를 향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단지 인간을 향해서가 아니라 모든 자연세계를 향해 좋다고 하신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좋다고 하는 것은 피조세계가 인간의 필요나 목적에 상관없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인간 편에서 보기에 피조세계가 무의미하고 이해 불가능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피조세계를 긍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피조세계는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답다 한 것을 인간이 부정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해충이니 잡초니 하는 것들조차 하나님 안에서는 다 목적이 있고 아름다운 생물들이다.
셋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 전통적 창조신학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구분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지배자로 파악한다. 그러나 생태학적 창조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운명체다. 인간(adam)이 다른 동물들처럼 여섯 째 날에 지음을 받았고(창 1:31), 똑같이 흙(adamah)으로 지어졌으며(창 2:7), 인간이 죽게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창 3:17-19)은 인간이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태학적 진리를 말해 준다. 한편, 인간과 자연은 타락으로 인한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도 공동운명적이다. 인간의 죄악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창 3:17-18). 한편,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세계도 신음과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구원의 날을 함께 희망한다는 말씀은 인간과 자연이 창조와 타락에서만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공동체적 운명임을 가르쳐주고 있다.(롬 8:18-22)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 종말론적인 왕국을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완전한 평화(샬롬)가 실현된 곳으로 묘사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9).
마지막으로, 인간은 자연세계에 대한 청지기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창 2:19-20)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어졌다는 창조이야기(창 1:26-28)는 인간의 특수한 지위나 책임을 암시한다.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뜻인 창조와 정의, 그리고 사랑을 모든 피조세계에 펼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하나님의 전권자로서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6-9장에 나오는 노아의 모습이다. 노아는 홍수 심판에 직면하여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생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만들었다. 창세기 2장 15절에는 자연세계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정원사’로서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말하자면 에덴동산은 경작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훼손과 파괴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인간은 비록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세계에 속한 하나의 종(種)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생물체들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 책임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라는 위탁을 받았으며,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연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청지기다. 인간은 주제넘게 자신이 자연세계의 주인인양 행세함으로써 자연세계를 파괴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의 죄를 지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능력과 역할을 과소평가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종으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이런 이유에서 서구의 인간중심적 세계관도 비판의 대상이지만, 환경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면 자연종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교적이고 낭만적인 세계관도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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