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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예하재 복수초

성서와문화 2009.12.28 16:26 조회 수 : 1657

 
[ 작성자 : 허 만 하 ]


1.
〈나로호〉라 이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광경을 보노라 지난 8월 25일 오후 5시에 우리 식구들은 TV 앞에 모여 앉았었다. 다도해 국립공원에 속하는 남쪽 바다 수평선을 배경으로 소나무가 서 있는 우주 센터 둘레 풍경이 화면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내가 밟아 보았던 외나로도(外羅老島)의 한 풍경을 생각했다. 그것은 외나로도에 우주센터가 들어서기 이전의 자연이었다.

 

2.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자락 내나로도(內羅老島) 끝은 검은 뻘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뻘을 덮고 있는 초록색 파래 빛깔은 유난히 싱싱했다. 나는 바다를 감고 도는 길에 차를 세우고 고흥반도 끝자락, 또 하나의 섬 외나로도에 이르는 연육교를 바라보며 다시 이 다리를 건너기를 마음먹었었다. 6년 전 보름날 일이다.(2003년 2월 15일, 토).
땅 끝이 되는 외나로도 섬에 들어서서 내가 만났던 것은 테이프를 접어놓은 것같이 굴곡이 심한 고개였다. 이 고개를 넘어 내리막이 끝날 지음 만난 집 돌담에 붉은 페인트 금이 칠해져 있었다. 빛바랜 초록색 양철지붕의 이 집 둘레 마늘밭에서 만난 한 노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고개이름을 먼저 물었다. 그는 조석으로 드나드는 그 고개 이름이 ‘예하재’라 했다. 지도에도 없는 신선한 이름을 알고 나는 무슨 발견을 한 것같이 즐거웠었다. 이 고개를 넘기 전의 바른 쪽 숲에는 특이한 모습을 가진 소나무, ‘용송’이 3년 전에 발견되었고, 그 숲 속에는 흰 눈 밑에서 샛노란 꽃을 피우는 복수초 무리가 있다고 했다. 언젠가 눈에 덮였던 어리목고개를 지나, 제주 식물원에서 처음 보았던 복수초가 야생상태로 무리지어 피어 있는 꽃밭이 이 섬에 있다니! 그것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다. 오지에는 아직도 자연이 살아 있는 것이다. 자기 집 돌담 페인트는 우주센터 건설에 따르는 도로 확장 공사 경계표시라 했다. 그는 1억원의 보상금으로 다른 곳으로 떠나야한다 했다. 쓸쓸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던 그 노인은 친절하게도 복수초 군락이 숨어 있는 예하재 숲 들머리까지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비탈을 오를 수 없는 나를 대신하여 사진기를 든 아내가 숲 속에 들어갔다. 오리나무 숲에는 다래 줄기가 커튼처럼 늘어져 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했다. 바닥은 뜻밖에 돌밭이라 했다. 쌓인 낙엽과 돌밭 틈새를 비집고 별자리처럼 샛노란 복수초가 흩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에서 재배하겠다고 캐온 한 포기 복수초를 보배처럼 안고 내려왔었다. 나중에 현상한 사진으로 나는 현장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름 없는 변두리에는 아직도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고갯길 길가에 서있는 경사 12%라는 도로표시판 곁에 서 있는 전봇대에 기대어 나는 ‘나로도 복수초’라는 메모를 쓸 수 있었다.
외나로도에서 만난 그 친절했던 노인 명함은 이재환이었다. 돌아가서 전화로라도 인사를 하겠다는 뜻으로 적어둔 전화번호는 834-1477이다. 이 번호가 살아 있었던 그 집은 지금쯤 포장도로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으니 이 번호는 쓸모가 없는 미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보름날이니 집에 들어가 밥이나 같이 먹자고 권하던 그 분 마음씨는 가슴에 와 닿는 그런 것이었다.
지난 8월 25일 오후 5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나로호 발사광경을 바라보며 그 화면에, 얼굴이 흐린 이재환씨 모습과 S자로 크게 휘어지던 예하재 모습이 겹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 노인어른과 처음으로 이름을 알아내었던 예하재 안부에 이어지는 것이었다.

 

3.
뭍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로서의 섬은 귀양살이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나로도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나로도 남쪽 끝 나지막한 언덕 위에 덕양서원( 德陽書院)이 숨어 있었다. 이곳이 신임사화 당시(1721-1722 경종2) 좌의정이었던 이건명(李建命, 1663-1722)이 소론파의 득세로 역도로 몰려 유배형을 받아 산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이 내린 사약을 마셨던 오막살이 집터였다. 이 고장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 그 자리에 세운 서원이 바로 덕양서원이었던 것이다.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서원 문 양 쪽을 지키고 서 있었다. 나지막한 담 넘어 유난히 가시가 큰. 나이든 유자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이건명이 거처했을 것 같이 보이는 네모진 조그마한 집채 문 위에 九恩(구은)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부채모양 현판이 걸려 있었다. 행여 그 글씨가 시문과 서예로도 이름이 높았던 이건명 자신의 필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치 그 헌판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이고 있었으며 글씨 또한 특이한 것이었다.
유자 밭으로 접어드는 내리막 길섶에 피어 있던 야생의 청매 한 그루가 내뿜는 그윽한 향내가 왕위계승 문제로 벌어진 당파 싸움에 희생된 한 선비의 억울한 최후를 기억하듯, 뺨을 스치는 그날 바람에 묻어 있었다. 섬에는 때로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4.
풍경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던 최후의 5분간을 떠올리게 된다. 사형이 집행되기 5분전의 그는 이 5분을 알뜰하게 나눈다. 2분을 친구들과의 고별인사에 쓰고, 다시 2분을 이 세상과 헤어지는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나머지 1분은 둘레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사용한다는 것이 죽음을 앞둔 그의 생각이다. 둘레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최후의 1분을 바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정말 놀랄만한 깊이를 가진 말이다.
풍경의 가치는 그렇게 위대한 것이다. 풍경에 대한 내 나름의 이야기를 산문으로 써 본적이 몇 번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이야기는 여태껏 소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주어진 목숨의 마지막 1분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공간에서 바라본 지구를“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라 말했다. 우주공간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가가린에게는 하나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언어는 원래 부실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최후의 1분간으로 바라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풍경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5.
평생을 사유하는 일에 바친 하이데거는 ‘계산적’ 사유와 판이란 ‘명상적’ 사유의 본령에 바쳤다. 이 말은 그만치 인간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계산적 사유에 오염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사실 6년전 나로도를 찾던 그 날도 풍경을 만나러 낯선 길 위에 섰던 것이다. 풍경이란 계산적 사유를 말끔히 씻어낸 순전한( 無償의) 명상적 자세로 바라본 자연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광산을 개척한다든가, 지름길을 낸다든가 하는 목적으로 바라보는 자연은 계산적 사유의 소산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을 이용하려는 의도 없이 바라보았을 때 순수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풍경은 다시 유한한 것 가운데의 무한을 경계 짓는 자리에 태어나는 낯선 자연(가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고갯마루 굽이를 돌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것은 (예하재를 감아 돌 때도 그랬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낯선 (새로운) 풍경과의 만남 때문이다.
풍경은 침묵의 언어다.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은 풍경이 걸어오는 침묵의 언어에 귀기우리는 것이다. 풍경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풍경은 미적 대상이다. 미적 자연을 수용(인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인류 역사에 있어서도 일정한 문화적 수준이 필요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최후의 1분을 둘레 풍경을 바라보는데 쓰겠다는 말은 자연과의 마지막 마음의 대화를 시도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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