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김 순 배 -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


포구는 완만하게 둥근 반원을 그리며 품에 안길 듯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물결은 바로 발밑에서 잘게 찰랑이는 것이 바다라기보다는 마치 호수 같습니다. 멀리서 불 밝힌 밤배들과 가까이에 정박 중인 선박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아늑한 항구의 풍경을 더욱 정겹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듯 숙소에서 바라본 통영바다는 떠난 이들이 왜 이곳을 그토록 그리워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은 풍광과 분위기를 한껏 품고 있었지요.
택시를 타고 갈 때 보았던 거리의 간판 중에는 ‘내 고향 남쪽 바다...’로 시작하는 가곡에서 힌트를 얻었음직한 ‘가고파 미용실’ 같은 다소 촌스럽지만 잃었던 정감을 문득 일깨우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까 들어섰던 숙소의 로비에서 줄곧 흘러나왔던 것은 이 곳 출신 작곡가 윤이상의 실내악 작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그 어디를 가면 이른바 ‘현대음악 작곡가’인 윤이상의 작품이 예사롭게 흘러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일상의 장소에서 결코 순하지 않은 현대음악을 들으니 느낌이 묘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택시기사 아저씨들도 통영 시민회관에서는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가 연중행사로 열린다는 것 쯤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회관에 올라보면 역시 반짝이는 바다가 와락 품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렇게 손을 내밀면 닿을 듯 지척이게 바다를 가깝게 면한 연주장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물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은 그 흔한 개발의 손길을 염원할 생각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시가 통영입니다. 대신 통영은 자신이 품고 길러낸 한 세계적인 작곡가를 기리고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매년 봄, 가을이면 열리는 ‘통영 국제 음악제’가 그것이지요.
일찍이 젊은 날을 보내며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각인했고 만년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며 돌아와 보고 싶다던 윤이상의 고향, 통영. 속삭이듯 발치에서 찰랑거리는 물살과 아늑하고 정겨운 풍광들을 선생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혹자는 윤 선생을 이데롤로기와 연관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그 분을 둘러싼 외형적인 사건이나 상황이 그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 분을 이용하곤 하는 사례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모든 정치적 격동기 및 혼란기에 처했던 일군의 작곡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이면서 그들의 진실을 그 누구라고 정확히 꿰뚫어 알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도 동시에 해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입니다.

윤이상의 독주곡, 중주곡, 오케스트라 작품 등 다양한 형태의 앙상블이 연례행사로 연주되고 있는 통영에서는 매년 가을이면 국제 음악 콩쿠르도 열립니다. 첼로와 바이올린 그리고 피아노 부문으로 매해 번갈아가며 열리는 국제콩쿠르에는 이제 마악 커리어를 개척하려는 각국의 젊은 음악도들이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콩쿠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갖지요. 자신의 기량과 음악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기회이며 독주회는 물론이고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기회를 얻을 수 있거니와 주요 레이블과의 음반녹음 등 한 연주가로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콩쿠르를 통해 가능해 집니다. 물론 지금 활동하는 뛰어난 음악인들 가운데에는 굳이 콩쿠르라는 절차를 밟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국제 콩쿠르는 클래식 음악계 인재발굴의 주요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통영의 국제음악 콩쿠르를 처음 접했던 건 3년 전 피아노 부문이 시행될 때였습니다. 러시아,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등의 젊은 음악도들이 날개를 펼치고 싶어 하는 현장을 지켜본 느낌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지요. ‘피아노 연주를 어느 수준 까지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후를 기약할 수 있으려면 플러스 알파, 즉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개성 그리고 카리스마 같은 것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큰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을 했다는 것이 궁극적인 음악인생의 성공을 보장시키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잇더군요. 다른 예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음악계는 점점 자신의 취향대로 연주자를 골라 듣는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과 철학은 더더욱 필요해집니다.

통영 콩쿠르에서는 윤이상의 작품을 반드시 한 곡 연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이 국제 콩쿠르로서는 매우 특이한 점입니다. 동시에 이 대회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콩쿠르가 아니었더라면 단 두 세 개에 불과한 윤이상의 피아노 작품이 그렇듯 광범위한 관심을 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3년 전 불꽃 튀겼던 피아노 경연 이후 올 2008, 다시 피아노 국제 콩쿠르 결선 날, 다섯 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각자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결전의 장을 장식했습니다. 러시아 출신 참가자들이 역시 그들의 연주 전통에 입각한 스타일을 마음껏 드러내 주었고 미국. 이태리, 그리고 한국 출신 연주자들도 함께 각축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콩쿠르에 참여하는 연주자들의 마인드에 관한 것이었어요. 간혹 아니 자주, 콩쿠르라는 장소에는 이른바 ‘콩쿠르 사냥꾼’이라 지칭할 수 있는 참가자들도 적지 않거든요. 특히 비슷한 레퍼토리로 무장하고 이 콩쿠를 저 콩쿠르를 넘나드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됩니다. 실제로 올 통영 경남국제콩쿠르의 대상 수상자는 부조니 콩쿠르라는 유수의 피아노 콩쿠르 1등 입상자였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문제될 건 없지만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가 다시 경남 콩쿠르에 참여 했다는게 조금 석연치 않긴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 진출자였던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지금까지 다루어 왔던 레퍼토리 아닌 새로운 작품으로 결선에 올라온 사실은 비록 그가 4위에 그쳤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온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 미셀 베로프(Michel Beroff)와의 만남은 또 특별한 것이었지요. 그가 바로 ‘메시앙 콩쿠르’ 출신의 뛰어난 올리비에 메시앙 전문 피아니스트라는 점은 유명합니다. 올해는 바로 메시앙 탄생 100주년이고 20세기의 위대한 작곡가인 그를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곳곳에서 마련되고 있기도 하지요. 평소 베로프의 음반들을 통해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던 터라 직접 얼굴을 대하게 되니 퍽 반갑더군요. 유명한 피아니스트답지 않게(!) 소탈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 그로부터 모든 불필요한 겉껍질을 벗어버린 진솔한 예술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통영과 윤이상, 윤이상과 통영 그리고 그 이름 때문에 전혀 낯선 이국의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국제콩쿠르에 참여하고 있는 이국의 음악도들......
결선의 흥분을 그들과 함께 느끼며 돌아온 숙소의 창밖으로는 고즈넉한 밤바다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발치에서 찰랑거리며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를 정감을 안기는 그런 바다입니다. 그 꿈꾸는 듯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작곡가의 이름을 올바르지 못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와 차별화되어 통영국제음악제 및 콩쿠르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음악축제로 자리 잡기를 염원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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