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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하나님

성서와 문화 2010.03.30 12:45 조회 수 : 2204

[ 작성자 : 이 문 균 - 신학 / 한남대학 교수 ]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상상력을 발휘하여 말하자면 하나님은 함께 어울려 춤을 추시는 분이다. 춤은 아름답다. 춤을 추는 사람도 아름답고, 춤이 만들어내는 광경도 아름답다. 그런데 춤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사랑이 흐르고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춤을 보는 사람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흥이 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독교는 바른 이치(진리)와 바른 행동(윤리)에 대한 가르침이 전부인 줄 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바로 믿는지, 바로 행동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는 재판장과 비슷한 존재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루한 세월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흥분과 재미를 찾아 어둡고 은밀한 곳을 찾는다.
하나님의 경우, 존재하는 것(to be)은 곧 사랑 안에 존재하는 것(be-in-Love)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랑 안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사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귐(koinonia)이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사귐은 함께 삶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서 볼 수 있듯이 참으로 깊이 사귀는 사람은 기쁨, 슬픔, 희망, 고통, 책임을 함께 하면서 살아간다.
사랑의 사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서로 어울려 아름답게 춤추시는 분이다. 춤은 삶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을 리듬에 맞추어 보여준다. 사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춤추는 모습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내적으로 신적 인격들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을 옛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안에 거하며, 서로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어주고,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환대한다. 비유적인 표현을 덧붙이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삶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사랑의 춤과 같다.
그런데 사귐과 춤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로 확대된다. 사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 사귐을 우주적으로 펼쳐나가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주적 사귐의 삶의 원천이요, 그 사귐을 유지시키는 바탕이요, 그 사귐의 삶의 최종 목표이다. 성서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는 춤추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세계와 인간을 찾아오시고 함께 춤을 추시는지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성령의 기쁨과 사랑으로 춤을 추시다가 우리와 사랑의 춤을 추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춤의 주님이시다. 캐나다 연합교회 찬송가에 나오는 “그 아침에 나는 춤을 추었지(I Danced in the Morning)”라는 곡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미 지역 어린이들이 성탄절에 잘 부르는 그 찬송의 가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 나는 춤을 추었지, 달과 별, 태양 사이에서 춤을 추었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 내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나는 춤을 추었지.
춤을 추어라.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춤의 주님. 너희를 이끌어 가며 스텝을 밟으리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춤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
(2)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춤을 추자고 했었지, 그들은 춤을 추지도 나를 따르지도 않았지. 어부 야고보와 요한에게 춤을 추자고 했었지. 그들은 나를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었지.
춤을 추어라.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춤의 주님. 너희를 이끌어 가며 스텝을 밟으리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춤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
(3) 나는 안식일에도 춤을 추며 장애인을 고쳐주었지. 성직자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했다며 나를 때리고 높이 매달았지. 그들은 나를 십자가에 버려둔 채 떠나버렸지.
춤을 추어라.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춤의 주님. 너희를 이끌어 가며 스텝을 밟으리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춤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
(4) 캄캄한 금요일 밤 나는 여전히 춤을 추었네. 너희를 등지고 악마와 춤출 수는 없지. 그들은 내 몸을 장사지내고 내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나의 춤은 계속되었네.
춤을 추어라.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춤의 주님. 너희를 이끌어 가며 스텝을 밟으리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춤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
(5) 그들은 나를 죽였으나 나는 더 높이 올라갔지. 나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생명이니라. 너희가 내 안에 살고 나는 너희 안에서 살리라. 나는 춤의 주님이니라.
춤을 추어라.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춤의 주님. 너희를 이끌어 가며 스텝을 밟으리라. 어떤 처지에 있든지, 춤 가운데 너희를 인도하리라.

기독교는 오래 동안 춤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신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할 줄 몰랐다.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다. 리차드 해리스(Richard Harries)는 기독교가 진리와 도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였다. 신이 아름답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리차드 해리스/김혜련 옮김, 『현대인을 위한 신학적 미학』 (서울: 살림출판사, 2003), 17.) 그는 진리와 선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신의 본성 또는 신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신이며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그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교회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동방정교회의 전통 가운데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간간히 보인다. 그리고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인식하였다. 그는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제서야 나는 그리도 오래되고 너무도 신선한 아름다움이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St. Augustine, Confessions, tr. by Henry Chadwick (OUP, 1992), 20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서로 깊이 연관된다. 그는 요한일서4:17-21에 관한 설교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을 연결시킨다. 그는 우리는 사랑함으로 아름답게 변화된다고 강조한다. 비록 우리가 추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아름답게 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의 영혼은 불의(不義) 때문에 추하지만, 신을 사랑함으로써 아름답게 된다. 사랑하는 자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은 항상 아름다우시고, 결코 추한 적이 없으시며, 결코 변함이 없다. 항상 아름다우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더럽고 추한 우리를 그가 사랑하셨을 때 우리는 어떠했던가? 그러나 우리를 추한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켜 추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만드신다. 우리가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 항상 아름다우신 그분을 사랑함으로써이다. 사랑이 당신 안에서 커가듯이, 아름다움도 커가나이다.

300여년 전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하나님을 아름다움과 사랑의 원천으로 생각하였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관계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향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에서는 아름다움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관계 속에서 확인되며, 다른 것과의 조화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미)은 서로 관계 가운데 있음을 전제한다. 아름다움은 무대에 올려놓고 모양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은 사랑을 통해 성취된다. 사귐, 관계, 합의된 인식,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움은 그 가치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그래서 홀로 탁월하기를 고집하는 신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사랑의 관계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신학은 에드워즈의 미적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어떻게 아름다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름답고 흥겨운 사랑의 춤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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