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이 정 배 - 신학 /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

 
필자가 선생님을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976년 가을, 신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당시 필자는 신학 수업을 계속 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기독교와 무관한 집안 배경 탓에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들어갔다는 거짓을 범하며 신학교에 진학했으나 그 곳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름답지 않았다. 일생을 유교적 가치관을 갖고 살아오신 부모님의 삶과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신학교에 발 들여 놓았던 터라 인간적 부담감, 죄책감도 적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 내내 자퇴, 타교진학 혹은 군 입대 등 숫한 생각에 시달렸고 떠밀리다시피 3학년이 된 나를 친구들은 학생회장으로 뽑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젤 유학을 마치고 40대 후반의 나이로 복직한 변선환 선생님은 필자에게 전혀 다른 삶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우선 신학 수업이 즐겁고 복된 일이 되었다. 그 시절 필자에게 신학 하는 즐거움을 안겨준 몇몇 강의가 생각난다.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현대 문학 속의 종교’, ‘감리교 신학’, ‘칸트 이후의 종교철학’ 등이다. 야스퍼스를 통해 신앙이란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라 자신의 길에 대한 무제약적 표현임을 배웠고 문학 강의는 무신론적 고뇌와 질문이 필요한 오늘의 현실을 자각토록 했다. 무엇보다 그의 감리교 신학 수업은 젊은 신학도의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웨슬리의 선행 은총을 말하면서 선생님은 그것이 카톨릭의 자연은총, 장로교의 예정론과 어떻게 다른 지를 설명했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밖으로 내쳐지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런 강의로 인해 교회에서 배운 이분법적 멍에가 벗겨졌고 타 신앙체계, 무엇보다 부모님을 이해하는 시각이 교정 되었다. 물론 부모님은 후일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니다 돌아가셨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사가 될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옛 부터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었는가 싶다.

선생님을 만난 이후 필자의 신학적 방황은 끝이 났다. 학생회 활동으로 분주했지만 감신 도서관의 마지막 불을 직접 끄고 기숙사로 향할 만큼 책 읽기에 골몰했다. 매 강의를 통해 소개된 책들은 수십 권에 달했고 책들의 서문이라도 읽고 수업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로 그 시절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선생님의 침 튀기는 열정적 강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칠판에 힘줘 쓴 백묵의 글씨들은 나중에 지워지지 않아 물로 닦아야 할 정도였다. 강의 종료 벨이 울려도 보통 30분 이상 수업은 지속되었다.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싶으면 결코 입을 닫지 않으셨다. 보수적 신앙을 지닌 학생들의 반감어린 질문도 선생님의 열정을 북돋았을 것이라 사료된다. 4학년 봄 학기 어느 날 저녁 7시에 시작된 보강수업이 있었다. 9시면 끝날 줄 알았던 강의가 학생들의 질문으로 자정 가까운 11시 30분이 되어서야 종료되었다. 선생님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설명했고 그 일로 인천에서 통학하던 학생들 10여명이 귀가하지 못하고 기숙사 방에서 끼워 잤던 일이 기억난다. 선생님 귀국 후 장안에 화제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감신 웰치 채플에 스님들과 신부 수녀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기 때문이다. 당시 선생님은 총학생회가 주최한 학술 심포지움의 초청 강사였고 그가 발표할 주제가 ‘공(空)’과 십자가였다. 불교와 기독교 간의 최초의 대화가 감신 교정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회를 보았던 필자는 강단에서 수많은 까까머리 스님을 보았고 선생님의 낯선 강의에 온 맘을 기울이며 그 현장을 가슴 속에 새겼다. 강연의 핵심은 결국 자아(Ego)의 죽음이었다. 불교가 말하는 空이나 십자가는 모두 더 큰 자아를 제시하는 저마다의 종교적 표상이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였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필자의 목마름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월간 목회>를 통해 총신대 박아론 교수와의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없다’의 논쟁이 일어난 것도 그 시점으로부터 멀지 않다. 기독교가 서구로부터 물려받은 신학 그대로를 고수하려는 박아론 교수의 입장과 토착화(아시아) 신학 전통은 물론 가치 다원주의 시각을 갖고 진보적 신학사조와 대화하는 선생님의 생각이 대립된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일은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일이었다. 교회가 진리를 독점했다는 생각을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낡은 사고라 보았던 선생님의 의견에 대다수 한국 교회는 냉담했다. 그럼에도 교회와의 사랑하는 싸움은 지속되었고 그것은 불교적 토양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언표하려는 토착화 작업으로 나타났다. 그 옛날 기독교가 희랍적 토양에서 표현되었듯 불교적 사유 틀에서 새로운 케리그마(비케리그마화)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시아적 사유로 토착화된 기독교야 말로 이분법에 사로잡힌 서구 기독교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선생님은 확신했다. 바젤 대학교에 제출된 박사논문이 교토학파에 속한 야기 세이찌의 불교적 기독론을 주제로 한 것임을 숙지 할 필요가 있다.

변선환 선생님을 만나 신학의 맛을 알았던 필자는 대학원 시절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했고 그를 토대로 선생님을 지도했던 바젤의 스승 프릿츠 부리의 ‘만유의 주(Pantokrator)’ 기독론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800페이지 분량의 원서, 문장 하나가 반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길고 난해한 그의 글을 읽으며 부족한 논문을 제출했으나 선생님은 만족하셨고 해천 선생님과 상의 끝에 우수 논문상을 수상토록 했다. 실상 이것은 빛이 아닌 존재에게 ‘너는 빛이다’라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학문할 자질과 여건이 부족했음에도 과분한 칭찬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선생님의 제자 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석사 논문을 마친 후 2년 남짓한 군대생활 중에 선생님은 학문의 길을 자극하는 편지, 失戀했을 때 위로하는 편지, 그리고 바젤 유학의 길이 열렸다는 복음과도 같은 소식을 전해 주셨다. 이런 일은 비단 필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토록 세심하게 보살 핀 결과 20명 남짓한 제자들이 학위를 얻고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걷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난 것이다. 선생님 돌아가신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년 8월 선생님 묘소를 함께 찾고 있으며 유족과 함께 “변선환 아카이브”를 만들어 학문적 차원에서 선생님의 有志를 잇고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신옥희 사모님이 늘 말씀하듯 가족보다 제자사랑을 우선하신 선생님의 큰 마음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님의 모교 바젤 대학교로 우리 부부를 떠나보내며 선생님은 해천(海天)의 뒤를 이어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에 몰두하라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선생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닮으라고 은연중 강요하는 버릇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따르고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아류들이 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언제든 자신을 험한 세상의 다리로 생각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딛고 더 큰 세계로 나갈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필자에게 불교가 아닌 유교의 길을 택하게 하신 것도 한국 기독교의 총체적 미래를 염려하신 사고의 결과였다. 교회 정치가들로 인해 모진 종교재판을 당하시고 머리 둘 곳 없었던 예수처럼 주일 날 갈 교회가 없어 한 없이 외로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분의 제자사랑은 눈물겨웠다.
1992년 어느 날 우여곡절 끝에 교직을 접으신 그 분의 은퇴를 기념하는 논문집 증정의 자리가 있었다. 정동교회였다고 기억된다. 답사를 통해 선생님은 눈물을 보이시며 ‘내 제자들을 건드리지 말라’, ‘No Touch!’ ‘그들은 노다지들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이것은 그 분의 절규였다. 자신 한 사람을 희생양 삼은 것으로 족하라고 한국 교회를 향해 사자후를 토한 것이다. 선생님 사고의 폭과 깊이에 있어 그 절반도 못되는 우리가 결코 노다지(No Touch)일 수는 없다. 우리들이 감당해야 될 진리, 열려진 사고, 우주적 그리스도가 바로 노다지의 본뜻일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가 교권으로 부터 지키려 했던 대다수 제자들은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선생님이란 다리를 건너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곰곰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海天으로부터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을 배웠다면, 一雅에게서 우리가 배운 바는 고뇌하는 신학적 실존, 열려진 삶의 개방성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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