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임 인 진 - 시인 ]

 
1
초록 톱니치마
맘에 안 든다고
길가에 누워 뒹굴다가

흙투성이 되어
발버둥쳐 울다가

눈부신 새아침에
노란 저고리 하나
꺼내 입고는

배시시
웃고 앉았다.

2
빛바랜 저고리
홀랑 벗어던지고

하늘하늘
속옷 바람에
아스스 떨다가

발가벗은
홀씨로 태어나
하얀 양산 하나씩 받들고

나붓나붓
떠간다.
3
바람 따라
떠돈 홀씨 하나

길바닥 틈서리
비좁은 먼지더미에
살금 내려앉아

찬 서리 눈비 맞으며
아무도 몰래
아프게, 아프게 싹 틔운다.

4
오가는 발길 무서워
납죽 옹크리고
숨죽여 지내다가

뿌리째 뽑혀
모퉁이 길바닥에
나동그라졌다가

밤이슬 흠뻑 젖은
가엾은 몰골로
간드랑거리는 목 곧추 세워

햇살 한 가닥 잡으려고
발돋움 하다말고
생그레 웃는 민들레꽃
- 동시 「민들레」 -
저리도 작디작은 숨결들이 오롱조롱 모여앉아 환한 미소로, 살랑거리는 바람과 눈부신 햇살과 드넓은 우주의 오묘하고 신비한 외경(畏敬)을 살그머니 귀띔해 주는군요.
세상천지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가도, 때로는 하찮게 여겼던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하고, 우리를 일깨우기도 하여 놀라게 됩니다.
피고 지는 민들레의 사계(四季)를 지켜보노라면 그 또한, 한낱 풀꽃의 통념을 넘어선 이상의 이미지로 가슴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작은 새들이 포르르 숲으로 날아들고, 서쪽하늘에 초승달이 새파랗게 날을 세운 밤이면 더러 생각이 열릴 것도 같아 불을 끄고 방에 틀어박혀 보곤 합니다. 머리 속을 맴도는 언어란 언어 모두 잡아 접목시켜봅니다. 욕구와 집착이 지나치면 그때마다 대상(對象)을 뛰어넘은 군더더기 허상(虛像)을 지을 뿐입니다.
생각을 잠재워 안으로 풀어놓고 오래오래 삭히다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싹틔운 교감(交感)과 이어지게 됩니다. 자연에의 짙은 감동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는 길이 첩경(捷徑)인 것 같습니다. 생생한 느낌이 되살아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산과 산이 서로서로 어깨동무하고 줄줄이 늘어선 곳, 골짜기 산바람이 봇물 터지듯 불어오던 벌판에도, 버들치와 모래무지 잡는 사내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냇가 풀숲에서도 눈부시게 웃어주던 꽃, 조붓한 학교 길가 사람들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힘겹게 피어나서 웃어주었지요.
내가 맨 처음 알게 된 그 꽃의 이름은 「담뽀뽀」란 일본말이었어요. 그 어감이 귀엽고 앙증맞기는 해도 민들레라는 이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겉보기에 치우친 느낌이지요. 민들레라는 이름을 맨 처음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맨발로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나물캐던 해맑은 모습의 산골소녀가 연상되지 않던가요?
그 많은 꽃들이 건네주던 영상(映像)이 떠오를 때면 한 편씩 따로 쓴 것들을 한데 묶으니 민들레의 사계가 되었네요.
무심코 지나는 메마른 영혼들에게 밝은 빛 한 줄기 안겨주려고 길바닥 비좁은 먼지틈새에 내려앉아 싹틔운 민들레 홀씨, 흙투성이로 주저앉아 밟히면서도 따스한 빛살, 스치는 바람 한 자락마저도 꽃송이에게로 넘겨주는 처절토록 가련한 톱니 잎이 있기에 민들레는 더 밝고 예쁘게 피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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