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김 순 배 -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


제주도와 금관악기는 왠지 썩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적나라하게 뜨거운 햇살, 멀리 산록으로 불어갔다 해변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풍성한 바람은 열정적인 금관악기의 음색과 많이 닮아 있다고나 할까요?
그 열렬한 제주도의 한낮을 식혀주기에는 한줄기 청랑한 트럼펫이 제격이고 진하게 푸른 밤을 진정시켜주기에는 그윽한 호른 소리가 딱 입니다. 게다가 트럼펫처럼 아주 높지도 튜바처럼 아주 둔중하지도 않은 트롬본의 매력은 하루 중 어느 때 들어도 서늘함과 따스함을 동시에 전합니다. 거기에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넓은 계층으로부터 사랑받는 색소폰까지 더해지면 금관악기들의 어울림은 더 이상 호사스러울 수가 없게 되지요.
그렇듯 다채로운 금관악기들의 앙상블 축제인 국제관악제가 제주에서는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해마다 8월 중순이면 세계 여러 나라의 금관악기 앙상블 팀과 브라스 밴드들이 제주도로 모여듭니다. 그 중에는 세계 정상급의 앙상블 팀부터 독일의 순수 아마투어 팀 그리고 한국의 여고생들로 구성된 브라스 벤드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다양한 팀 칼라를 자랑합니다.
올해는 특히 격년으로 열리는 국제 관악 콩쿠르까지 곁들여져 금관악기의 풍성한 사운드를 총체적, 집중적으로 실컷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평균 세 차례 이상의 공연이 실내와 야외를 막론하고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있었고 각종 워크샵이나 특별 세미나들도 주목에 값할 만한 것이었지요. 제주도에는 또 바다나 폭포에 접한 야외 공연장이 다른 지역보다 활성화 되어서 금관악기에 어울리는 옥외공연을 효과적으로 펼치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관악기 특히 금관악기들은 예로부터 야외행사에 주로 쓰이던 악기였습니다. 중세시대를 묘사한 영화 같은 데에서 흔히 나오기도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성루에 올라 기다란 나팔을 부는 병사들의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왕이나 귀족이 사냥이라도 나갈라치면 곡선으로 휜 코넷(옛날 트럼펫)을 볼이 빵빵하게 불어대는 신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그 중세보다 더 먼 기원전 그리스 시대에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로 대표되는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 때 꼭 쓰이던 악기들이 있었습니다. 이성과 각성을 상징하는 아폴로에게 드리는 제사에는 류트와 같은 현악기가, 도취와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에게는 아울로스라 불리는 지금의 오보에와 같은 관악기가 주로 쓰였지요. 아무래도 현악기보다는 음량이 훨씬 크고 더 멀리 퍼지며 음색도 외향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악기의 특성이 디오니소스와 어울리는 건 사실입니다. 또한 사람의 몸이 직접 소리 내는 데 사용되지 않고 활이나 채가 소리를 만들어내는 현악기와 달리 사람의 입이 직접 닿아야 소리가 생성되는 관악기가 더욱 직설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데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인간과 밀착되어 효과적인 매체로 쓰여 왔던 관악기들은 교회음악이 대세였던 중세와 르네상스 때에는 잠시 숨을 죽이게 됩니다. 단지 교회 밖 세속음악이나 왕족들의 야외활동 시에 반드시 동원되기는 했지요. 이윽고 19세기를 거쳐 20세기를 맞으며 금관악기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서 각 악기의 개성적 음색에 맞는 작품들이 다량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가늠할 때에도 현악파트보다는 관악 그것도 금관 파트의 기량을 보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 만큼 금관악기를 일정 수준 이상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으면서 대단한 성취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럽과 미국의 내노라하는 프로팀들이 집결된 이번 축제에서 오히려 눈에 띄었던 팀은 독일의 아마투어들로 구성된 ‘로렐라이 앙상블’ 이었습니다. 판사, 교사, 세무서장 등등의 일반 직업을 가진 이들이 트럼펫과 호른을 불고 튜바를 진지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지요. 멤버 중에는 한 가족 전체가 끼어 있기도 했습니다. 음악적 전통이 유구한 나라에서 가족이 모두 브라스 앙상블 팀의 일원이 되어 음악을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이 매우 흐뭇해 보였습니다.
한편 유럽의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중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부치나 앙상블 본’이라는 팀은 다른 면에서 특이했지요. 트럼펫의 옛 명칭이기도 한 ‘부치나(Buccina)’라는 팀 이름답게 그들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옛 금관악기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고악기 그것도 古금관악기를 들을 기회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서귀포 천지연 폭포 야외 공연장의 눅진한 밤공기를 ‘부치나 본 앙상블’의 진기한 서양 옛 악기의 음향이 청랑하게 흔들었습니다. 비록 오락가락하는 밤소나기 덕분에 청중들은 우비를 둘러쓰고 감상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이토록 희귀한 연주를 제주도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세계 정상급 수준이라 할 수 있는 팀인데 서귀포의 외진 야외공연장에서 소수의 청중들만 그것을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던 것입니다.

다음날 헝가리 팀의 연주는 정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유쾌한 것이었습니다. 헝가리 출신 유명 지휘자 게오르규 솔티의 이름을 딴 젊은 앙상블은 바흐로부터 락 그룹 ‘퀸’의 레퍼토리에 이르기까지 종횡 무진하는 음악적 소화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브라스 앙상블의 매력 중의 하나는 이토록 장르의 경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넘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악기나 성악 등에도 ‘크로스 오버’가 가능하지만 이렇게 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팝, 재즈와 클래식 나아가서 古음악을 동시에 선보인다는 것은 바로 브라스(brass)만이 가진 강점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음악적 스펙트럼을 누구보다 넓게 보유한 연주자들이 바로 금관악기 주자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어서 들은 한국의 모 여고 관악단의 연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로 색소폰과 트럼본이 주를 이루고 드럼과 같은 타악기가 더해진 그들의 연주는 고교생답지 않게 거침없고 익숙했지만 레퍼토리가 모두 팝과 가요 일색이었던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들었던 미국의 정상급 팀 ‘체스트넛 브라스 앙상블’의 프로그램이 거의 대부분 미국산 음악 위주로 짜인 것도 비슷한 맥락의 아쉬움을 안겼구요. 그래도 제주시 해변 공연장에 때마침 불어오던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그들에 뒤이은 계명대학교 관악단의 장쾌한 마무리 연주를 듣는 즐거움이 모든 아쉬움을 상쇄해 주었습니다.

이번 ‘제주 국제 관악제’는 각종 관악 앙상블을 접하고 즐기는 이벤트임과 동시에 국제 콩쿠르를 통해 관악 연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대개 앙상블이나 밴드의 구성악기로만 여겨왔던 트럼펫, 호른, 트롬본, 튜바 같은 악기들이 독주악기로 변신하며 진행된 콩쿠르도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지요. 비록 우리나라 참가자들이 결선에 많이 오르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세계 각국의 젊은 금관악기 연주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은 특별한 기쁨이었습니다.
제주도의 뜨겁고 눈부신 낮과 짙게 푸른 밤을 풍요롭게 장식해 준 국제관악제가 보다 수준 높고 행복한 축제로 발전해 나가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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