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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길·철학의 길

성서와 문화 2010.03.30 12:41 조회 수 : 1710

[ 작성자 : 허 만 하 - 시인 ]


1. 이 지음 경주에서는 폐허에 부는 바람이 억새를 흔드는 모습을 만나보기 힘들다. 그래도 사람들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신화의 흔적을 밟아보기 위하여 이 고장을 찾게 된다. 경주라는 지명에는 무한(無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경주의 전설은 우리 겨레를 지배했던 사유의 원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어제는 서출지 못뚝을 감아 도는 배롱나무를 따라 못을 반 바퀴쯤 돌았다. 수련으로 이름 나 있는 이 못의 연꽃은 대여섯 송이가 피어 있을 뿐, 안압지에서 볼 수 있었던 인공적인 화려함이 없는 쓸쓸한 소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한정한 분위기가 경주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못뚝 벤치는 비어 있었다. 이런 소박한 맛을 나는 목월이 걸었던 길에서 만나보았다.

2. 철학의 시작이 세계에 대한 ‘놀라움’이란 생각을 했던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다. 투명한 햇빛과 해맑은 에게바다 물빛과 아크로 폴리스 신전의 대리석 원주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가장 창조적인 사유를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 다른 독자적인 생각을 외롭게 내 세웠던 한 일본인 철학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니시다 기타로(西田 幾多郞 1870-1945) 이다. 내가 교토에 있는 그의 집 둘레의〈철학의 길〉을 걸었던 것은 1979년 7월 3일의 일이다. 일본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아라가와 요지(荒川 洋治)의 안내로 걸었던 이 길은 길가 개울에 피라미가 헤엄치고 있는 것이 보이는 고요한 길이었다. 니시다는 이 길을 걸으며 그의 사색을 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들, 자기의 자기모순의 사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의 동기는〈놀라움>이 아니라 깊은 인생의 비애가 아니면 안 된다. (강조 필자)

철학의 동기를 생활의 슬픔에서 찾는 이 철학자의 사유에는 철학을 경험에서 찾는 독자성이 엿보인다. 그 후 나는 니시다 철학의 배경에는 이 철학자 자신이 겪었던 삶의 슬픔과 아픔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제3고등학교에 기증한 그의 장서 안표지에 손수 적어둔 한편의 단가(短歌)를 읽고 나서부터이다. 그것은 23세의 한창 나이로 죽은 장남을 두고 지은 단가다. 그가 남긴 다른 단가에서는 요절한 이 아이의 책이랑 노트를 정리하는 애틋함을 엿볼 수 있다.

들것에 실려 이 길을 떠난 그 날부터 돌아오지 않는 놈이 되어 버린 내 자식.

약 30년 전의 어느 여름날 내가 걸었던 길이 바로 니시다의 장남이 들것에 실려 병원을 향했던 그 길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철학자가 조석으로 걸으면서 사유했던 그 길에 그의 비애가 겹쳐 있는 사실은 엄연하다. 그가 사랑하던 아들을 잃었던 것은 한해 전 그의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 있는 때였다.(이후 5년 동안 그의 부인은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 무렵의 니시다를 욥에 비기기도 했다. 니시다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그의 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 후의 한 저서에서 그는 다시 “행위적 자기의 괴로움 그 곳에 철학의 참된 동기가 있는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3. 경주 건천 모량 마을 사람들이 양금산이라 부르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이 산은 단석산 잔가지의 하나쯤일지도 모른다. 산자락을 감아 도는 조그마한 도랑과 길을 따라 아주 부드러운 비탈을 오르면 마을 끝쯤 되는 곳에 우리 시(詩)의 역사에 불멸의 발자국을 남긴 박목월의 생가가 있다. 그제는 이 집을 찾아보았다. 생가에 이르는 길가에 조그마한 기념비가 하나 서있었다. 그것은 근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겨우 차가 한 대가 지날만한 길을 낸 일을 기념하는 표시였다. 이 길이 다듬어지기 이전의 골목길을 걸으며 어린 목월은 안강 초등학교에 다녔던 것이다(제6회생). 또 대구의 계성 중학교에서 방학이면 이 길을 밟아 집을 찾았던 것이다. 대지 120평의 이 터전에는 원래의 초가집은 사라지고 타일이 발려 있는 새집이 들어 서 있었다. 나는 그 집터에 들어서서 목월 시에 나오는 ‘산그늘’이란 말이 가지는 두께를 생각했다. 이 집은 그만치 산자락에 붙어 있었다. 산협의 해는 빨리 진다. 목월의 어린 시절은 양금산 산그늘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나는 그 집 뜰에 서 있는 한 그루 나이 든 엄나무 가지 끝을 쳐다보며 목월이 즐겨 쓰는 ‘해그름’의 의미를 생각했었다. 언젠가 그의 생가가 옛 모습을 되찾고 골목길이 제대로 살아나면 그 길을 〈시의 길〉이라 이름 지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일제 말기 지금은 사라진 목월의 초가집을 찾아 하룻밤을 묵은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1989)은 목월에게 “발표 할 데도 없고 불러줄 아이도 없는 노래를 자꾸 지어서 무얼하누…”라고 개탄한 적이 있다. 그 때 목월은 정색을 하면서 “땅을 파고 묻어두면 되지 않는냐”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윤석중 자신이 글로서 밝힌 비화다(心象 1978년 4월호). 194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이어 4월에 文章(정지용 추천으로 목월이 등단한 마음의 고향)도 폐간되었던 암울했던 시절 두 사람의 고뇌를 비밀처럼 비추던 등불은 지워질 수 없다. 나는 사라진 옛 초가 봉창을 비치던 오렌지 빛 불빛을 떠올리며 그의 생가가 옛 모습으로 되살아나기를 빌었다. 가슴에 시를 안고 젊은 목월이 걸었던 골목길 위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유순한 그의 눈빛 뒤에 숨어 있는 결연한 의지의 빛이었다. 토함산자락에 ‘동리 목월 문학관’이 서 있기는 하되 그의 생가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그의 시 「이슬」(시단에서 잊혀진 이 시에 대하여 나는 한편의 시론을 쓴 적이 있다.- 『현대시학』, 2007년 4월호) 그는 슬픔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고 있다.

운다는 것은
차라리 마음이 넉넉하다
그냥
풀잎에 맺히는 이슬과 이슬의 가벼움

4. 이런 투명한 슬픔에 이르기 전에 그는 베개를 눈물로 적신 오뇌의 밤을 보냈었다. 철학의 동기가 놀라움이 아닌 슬픔이라면 시의 동기는 무엇일까. 목월은 스스로 ‘내가 눈물로 건너온 30대의 격류의 세계’라 부른 시절이 있었다. 그의 시『효자동(孝子洞)』의 한 토막은 격류를 건널 무렵의 그를 보여준다. “간혹 성경(聖經)을 읽기고 했다./ 마태복음 五장을 고린도 전서 十三장을/ 인왕산(仁旺山)은 해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외(山巍) 어둠에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燈皮)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慰勞)./ 그런 밤일수록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5. 예술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위기에 사는 것이다. 이 위기를 자각했을 때 예술가는 종교의 사도 이웃에 선다. 예술이나 종교나 궁극의 경지에서 태어난다. 한계를 깨닫는 정신의 극북(極北)의 산물로서의 언어 예술. 번득이는 조각도의 칼날 끝에 태어나는 언어가 그립다. 아침 햇살이 잎에 내린 이슬을 비칠 무렵 서출지의 수련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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