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이 정 배 -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 신학 ]


海天 윤성범 선생에 대한 긴 논문은 여러 편 쓴 적이 있었으나 짧은 지면에 개인적 관계를 적는 일은 처음인 듯싶다. 필자는 대학 4년간 그 분의 강의와 설교를 들었고 감신 최초로 학부 및 대학원 졸업장을 그 분의 이름으로 받은 세대이다. 당시 긴 세월 학교를 치리하던 홍현설 박사의 뒤를 이어 海天 선생께서 학장직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 신년 初라 기억되는 어느 날 선생님의 부음소식을 접했다. 그것도 이등병 딱지를 붙이고 있던 군생활 중에. 지금까지도 그것은 청천벽력의 일로 기억되고 있다. 海天 선생께서 펼칠 감신의 새 역사를 내심 기대하고 있던 필자로서 그의 갑작스런 타계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학창시절 필자는 학자로서의 선생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안목과 실력을 갖지 못하였다. 졸업 후 학문의 세계에 발 들여 놓으면서 그 때 그 시절 선생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곱씹을 수 있었다.
6년간 배움의 과정 속에서 지금도 남아있는 잔상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당시 성적표를 들여다봐야 정확하겠으나 필자가 선생에게 사사한 과목은 논리학, 바르트신학 그리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독 등이었다. 논리학 과목에서 필자를 황당케 했던 것은 두 번에 걸친 시험에서였다. 중간고사에는 ‘논리란 무엇인가?’가 기말고사에는 ‘판단이란 무엇인가?’를 물으셨다. 단답형에 익숙했던 우리로서 이런 큰 주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엉뚱한 분이라고 모두들 수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할 줄 모르는 우리의 한계였을 뿐 선생님의 물음은 참으로 정당했다.
순수이성비판을 독일어로 읽는 강독시간에도 한 학기 내내 1 페이지 분량도 읽지 못하였다. 한 줄 해석하고는 그와 관련된 무수한 이야기를 풀어내신 것이다. 학생들 중에는 선생께서 강의준비가 없어 딴 소리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에겐 그 때 들었던 칸트 주변의 이야기들이 학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생께서는 독일어 보다 사상을 가르쳤고 언제든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려 했던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던 당시 칼 바르트는 대단한 존재였다. 선생께서는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바르트 교수에게 직접 사사한 것을 대단한 긍지로 여기셨다. 영어의 ‘권위’에 해당되는 단어 ‘Authority’를 언제든 ‘오조리티’라 발음하며 스스로를 권위와 동일시하셨다. 물론 해학이 곁들인 것이지만 진실로 그리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필자는 바르트 교의학 강의에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 강의는 여전히 감(感)을 잡을 수 없었다. 바르트의 신학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그의 계시이해가 한국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말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시도가 감신의 전통인 ‘토착화’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다. 이처럼 선생은 바르트의 제자였음에도 타 신학대학의 교수들처럼 바르트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위대한 서구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곧 우리 것일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훗날 필자가 칼 바르트와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역시 바젤의 신학자 프릿츠 부리의 기독론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을 때도 선생님은 너무도 과분한 격려를 하셨다. 이는 선생의 궁극적 관심이 서구의 기독교가 아니라 한국적 기독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이외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들어 뇌리에 남아있는 몇몇 이야기를 본 지면을 빌어 옮겨 보겠다. 사실 선생님은 본래 감신 출신이 아니었다. 감리교 목사인 선친의 뒤를 이어 감신에 적을 두려했으나 폐병증세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후일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신학을 하신 분이다. 선천적인 허약체질로 인해 선생님은 건강비법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고 그를 실천에 옮기며 사셨다. 그중 하나가 ‘니시의학’ 이란 이름의 일본 내 비(非)제도권 건강법이었다. 그것의 실천으로 자신이 건강해졌다는 것을 증명하듯 선생님은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고 지내셨다.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맨살을 들어내 보이실 정도로 선생님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5명의 자녀가 모두가 딸이면서도 선생은 늘 동료 교수님들에게나 강의실에서 아들 낳는 법을 말씀하시기도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음식을 잘 가려먹고 합궁하는 날을 잘 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막내 따님의 이름이 귀남(貴男) -집에 남자가 귀하다- 인 것을 생각하면 海天의 말씀이 모순투성이 인 것이 분명하지만 모두들 그것을 즐겁게 수용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그가 없으면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신 따님들의 우수한 머리를 늘 상 자랑하셨고 이를 모두 사모님 공으로 돌리며 우리 신학생들에게 머리 좋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강변하셨다.
가끔씩 학생들 요구에 의해 노래를 부르셔야 될 상황에 이르게 되면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자신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성악가가 됐을 거라고.’ 그러면서 아베마리아 한 두 소절을 부르시곤 늘 내려 오셨다. 필자에겐 이것이 학부기간 중 서 너 차례 반복된 경험이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짧은 곡, 예컨대 학교종이 땡땡댕 같은 것을 연주하신 경우도 생각나긴 한다.

학자로서 선생님의 위대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종교사학회의 발족과 토착화신학을 감신 전통으로 뿌리내렸던 <誠(성)의 신학>등 몇 권의 책 출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海天 선생께서는 각 분야의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종교학자, 민속학자 그리고 역사학자들을 망라하여 한국에서의 종교역사를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학제간의 모임을 이끈 학문적 리더십을 지닌 분이었다. 그 본부를 감신대 내에 두고 여러 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하신 것이다. 이 때 유교학자 류승국 교수와의 깊은 만남은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본인의 학문적 과제로 인식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류승국 교수의 말씀에 의하면 海天 선생께서 <誠의 신학>을 쓸 무렵, 며칠, 몇 날 밤을 자신과 전화로 유교의 중심 주제, 특히 율곡의 誠 개념에 대한 긴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통합 학문적 분위기가 이제야 세간의 화두가 된 것을 생각하면 당시 분들의 생각이 앞섰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최근 한겨레신문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여정을 소개하는 문동환 박사도 海天으로 인해 늘 종교사학회 모임이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고 쓰고 있다. 주지하듯 海天 선생은 유동식 교수님과 함께 1960년대 토착화 신학 논쟁을 주도하신 분이기도 하다. 단군신화를 삼위일체 ‘흔적’으로 보고 신라시대 때부터 기독교가 한국 땅에 전래되었다는 가설부터 시작하여 ‘예수는 모름지기 효자였다’는 주장을 통해 한국적, 유교적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풀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신 것이다. 유교문화의 잔류량을 많이 지닌 한국에서 효(孝)의 빛에서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선교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록 기성 교단 지도자들과 보수 장로교 신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아 생각이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으나 선생님의 생각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 땅에 들어 온 기독교 복음은 ‘땅’의 힘에 의해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런 논리는 어머니의 머리가 좋아야 명석한 자녀를 얻을 수 있다는 선생님 개인의 독특한 경험과 무관치 않을 듯하다. 海天의 핵심작인 <誠의 신학>도 동양인에게 익숙한 ‘誠’의 속성, 즉 ‘不誠無物’- ‘誠이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에 근거하여 하느님 계시를 이해하고자 한 해석학적 작업의 일환이었다. ‘誠者天地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성자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란 말이 보여주듯 진실무망(眞實無妄)한 하늘의 길(誠)을 닮으려는 ‘誠之’의 길을 인간에게 요구한 선생님의 시도는 말만 무성한 오늘의 기독교 교회 행태에 너무도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여하튼 토착화란 이름하에 주체적으로 신학 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海天 선생님은 한국 기독교계의 꺼질 수 없는 등불임을 의심치 않는다.
필자는 선생님이 공부하던 바젤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선생님이 알려주신 토착화 신학의 길을 가고 있다. 일아( 一雅 )변선환 선생께서 유학을 앞둔 필자에게 海天의 학문적 계승자가 되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가 각기 주자학과 양명학을 근거로 신학을 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고 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니시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전집 7권을 편찬하는 일도 주관했다. 아들 낳는 법을 잘 배운 탓인지 아들만을 둘 나아 키우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맑은 영혼으로 주위를 밝게 했던 선생님의 거짓 없는 웃음과 해학을 배우는 일이다. 그와 관계했던 많은 분들이 그의 신학보다도 그의 웃음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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