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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더 신사(紳士)다

성서와 문화 2010.03.30 12:40 조회 수 : 1727

[ 작성자 : 장 기 홍 - 지질학 ]


나는 요즘 화면에서 ‘격투기(K-1)’라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경기를 자주 본다. 운동경기라고 미화하지만 야만스러운 치고받기요 싸움질이다. 흔히 한쪽이 실신함으로써 경기는 끝난다.
화려한 경기장, 요란한 호화무대에 우람한 두 사나이가 차례로 입장할 때는 각기 승리를 장담한다. 때로는 춤을 추거나 요란한 광대노름을 하면서 입장한다. 그러나 몇 분 후면 한 사람은 쓸어져 비참한 꼴이 되는데, 그 뻔한 결과를 보려고 비싼 입장료를 낸 선남선녀들은 그 수가 여러 만 명이다. 잔인성의 향연에 참여한 군상들이다.
지금은 실내에서 경기를 하지만 로마시대에는 야외 원형경기장에서 했다. 지금은 실신 정도로 만족하지만 로마 때의 검노(劍奴)들은 사투를 했다. 1세기 말에 쓰인 신약성경 요한서(書)의 저자는 사람들이 눈을 즐기는 욕심을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이라 했다. ‘눈 욕심’이란 뜻이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이란 구경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고 잔인성의 만족을 즐기는 카타르시스까지도 의미했다.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면서 로마시민의 눈을 즐겁게 해야 했던 기독교인들이었으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그 성악(性惡)에 관해 이해가 깊었던 것이리라. 사투(死鬪)의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관중의 원죄(原罪)를 기독교인들은 알았다.
‘철학박사’란 뜻의 피에취디(Ph. D.)를 가진 내가 격투 구경을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의외다!”하고 느낄 것이다. 실은 나는 폭력경기의 폐지론자로서, 내 앞에 있을 선한 싸움을 위해 준비를 하는 셈이다.
화면을 통해 보는 지금의 경기장은 로마시대에는 꿈도 못 꾸던 어마어마한 호화판 실내경기장이다. 이 가히 현대판 로마에 운집한 입장객들은 때로는 십만에 달해 보인다. 천문학적인 입장료 총액이야말로 그것이 바로 그 경기를 성립시키는 돈이다. 선수는 물론, 매니저, 프로모터, 기타 각양 임원과 무수한 요원들이 돈을 갈라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 경기가 성황인 것이다.
돈 때문에 선수가 된 검투사 아닌 권투사들은 때로는 얼굴에 수심이 역력하다. 화려한 각광을 받으며 등장하는 그들 얼굴에서 나는 가끔 겁먹은 표정도 본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의 대상이 되어 걸어 들어가는 희생양들이다. 다만 선수의 가족만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 뿐, 수만 관중은 박수갈채하며 어쩌다 선수가 쓰러지면 일어섰다 앉았다 흥분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상대를 쓰러뜨린 선수는 기쁨이 충천하여 손을 번쩍 들고 링을 한 바퀴 돌면서 기고만장, 뛰고 까불며 자랑한다. 사람이 쓸어져 깨어나지 못하는데도 모두들 예사고 승자는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이 비정의 광경은 비교육적이기 이를 데 없다. 일시 카타르시스를 맛보기 위해 다 같은 인간 동류를 혈투로 몰아넣는 관중이야말로 죄가 많다.
선수들은 링에 오를 때 자기 코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거저 무턱 대놓고 잠시 기도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불교도는 부처님께, 마호메트교도는 알라에게, 기독교도는 야훼에게 기도할 것이다. 혹은 자기만의 싸움의 신을 믿고 모시는 자도 있을 것이다. 후자는 차라리 이치에 맞으나 야훼, 알라, 부처 같은 공신(公神, 이는 내가 차음 써보는 말이다)에게 상대방을 쓰러뜨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신을 무척 난처하게 만드는 것 밖에 안 된다.
엄청난 장사들의 힘껏 단련한 주먹이요 다리이기 때문에 정통으로 맞거나 차이면 틀림없이 실신한다. 대개는 깨어나지만 영영 못 깨어나는 수도 있다. 링 위에서 사망하는 예는 주먹만 쓰는 권투 경기에서 더 자주 보인다. 보통은 사람이 죽으면 살인이 되지만 스포츠의 미명 아래 행해지는 살인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법에서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음은 물론이다.
인간의 잔인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카인의 후예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경기’의 장면들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장려 찬양한다는 점에서 비교육적이기 그지없으나 스포츠의 미명 아래 버젓이 자행되는 일종의 비리(非理)라 생각된다. 인류가 평화를 달성했을 먼 훗날에는 인류가 일찍이 저런 야만적 행사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오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랐기 때문에 늘 전원이 그리웠다. 은퇴 후 대구 근교의 가창(嘉昌)에 오두막집을 사서 산촌 생활을 시작한 것은 벌써 십년 전 일이다. 지금은 신축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처음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만권도 더 되는 많은 책을 둘 곳이 문제였다. 궁여지책으로 비교적 가까운 청도(淸道)에 책을 둘 창고를 짓고 그 안에 서재를 꾸렸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서(伊西)면에 있는 나의 도서관이다.
나는 이 서재를 드나들면서 이웃을 사귀었는데, 어떤 이는 해마다 소싸움 철이 되면 나더러 구경을 가자고 한다. 군민은 입장권을 싸게 살 수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다. 나는 소싸움은 동물학대라 생각하고 그 구경을 여러 해 미루다가 결국 가보게 되었다. 구경을 하면서 나는 “소가 사람보다 신사다” 하는 기이한 명제를 얻게 되었다.
소싸움은 다만 머리를 맞대고 밀기만 한다. 그러다 먼저 지친 소는 거품을 물고 혀가 드리워진다. 그 다음은 대개의 경우 오줌을 싼다. 그러다 몇 분 더 지나면 도망치게 마련이다. 이것이 지는 자(者)의 순서이고 그렇게 소싸움은 끝난다. 사람의 혈투에 비하면 무혈 순리(順理)로 승패(勝敗)가 가려지는 소싸움은 신사적이다. “소는 신사다” 하는 감탄을 연발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요즘 거꾸로 된 일이 허다하지만, 소와 사람의 신사(紳士)의 정도도 그렇다. 사람은 야만이고 소가 신사가 되었으니!
이 땅에는 본래 택견 같은 무술이 있었지만 점잖고 풍류(風流)적이어서 현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씨름도 그렇다. 근래 씨름은 차츰 입장객이 급격히 줄어 선수들은 흔히 케이원으로 전환한다. 이러구러 차츰 몹쓸 것만 성하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스포츠의 탈을 쓴 게임(game)이라는 이름의 격투기는 점점 더 악(惡)의 발산이 되어간다. 때려눕히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 관계야말로 악한 것이 아닌가? 때려 눕혀놓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야말로 악하지 않은가? 악을 조장하는 게임이 왜 자행되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어른들 할 일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는데 지금은 선을 권하는 일이 웃음거리 같이 되었고 악이 예사로 장려되고 있다.
세상은 왜 점점 살벌해지고 악랄, 잔인해지는가? 권투나 케이원은 그런 세상 모습을 여실히 반영한다. 구경을 하고 있으면 지금이 바로 로마제국의 전성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무력으로 제국을 유지하던 때요 전쟁포로나 노예나 범인(犯人)이 검투사가 되던 때다. 그러나 지금 이 문명했다는 시대의 노예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하여 격투사가 된 신종 노예들이다. 돈의 세력을 방치한 나머지 돈의 귀신이 사람을 마구 끌어다가 노예로 부리는 것이다. 돈의 자유방임(自由放任)을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저 목숨도 내건 선수들의 위험천만한 폭력 경기를 금지하도록 권유하자.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의 유혹을 누르고, 선수들의 피를 나눠먹는 스포츠 전문인들, 스포츠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사기꾼들을 물리쳐야 한다.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이란 말이 났으니 그 극치의 또 하나인 포르노에 대해서도 언급해 보겠다. 성행위의 장면을 구경거리로 비디오에 담아 그것을 양산(量産)하여 돈을 버는 신종산업이 얼마나 극성인가. 사람의 안목의 정욕을 기화로 그런 것들이 버젓이 나도니 특히 아이들에게 비교육적이기 그지없다. 이런 것들이 다 돈주의(主義) 곧 자본주의의 귀결이다. 소는 번식의 필요에 따라 본능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거기 비해 사람은 쾌락과 돈을 위해 소보다 훨씬 못한 야만을 저지른다. 소가 신사인 까닭은 이렇게 여러 가지다.
방임(放任) 자본주의에 족쇄를 채우자. 사람들의 ‘안목의 정욕’을 기화로 돈을 버는 족속을 징계하자. 돈의 여신의 치맛자락을 찢어 만천하에 치부를 고발하자. 돈의 세력을 통어(統御)해야 한다. 사태를 직시하고 조치를 취하게 자각과 여론이 일게 하자. 조금씩 유토피아에 가까이 다가서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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