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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박대선 박사님과의 만남

성서와 문화 2010.03.30 12:39 조회 수 : 1599

[ 작성자 : 이 계 준 - 연세대 명예교수 ]


신학 내가 스승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평양 제일고급중학교(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었는데 학교의 공산주의 세뇌교육과 일요일의 강제동원 등에 반발한 나머지 자유로운 분위기로 정평이 나 있는 “성화신학교”로 가겠다고 선친께 말씀드렸다. 마침 선친께서는 신학교 교무과장이신 박대선 목사님을 아신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신학교에 가서 간단한 시험과 입학 수속을 마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학년에 속한 나는 멀리서 스승님의 용안만을 뵐 뿐 강의를 들은 적은 없었다. 억압적이고 포로수용소 같은 고급중학교와는 생판 다른 자유와 환희의 동산 성화신학교는 그 해 12월 성탄축하예배를 끝으로 당국에 의해 배덕영 교장님은 체포되고 학교는 폐교되었다. 내가 스승님과 오늘까지 계속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55년부터이다. 그 때 스승님은 미국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감리교신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셨다. 3학년이었던 나는 그분의 강의를 처음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분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된 것은 나에게 신앙의 어머니와 같으신 안상현 선생님 때문이었다. 두 분은 성화신학교에서 함께 교수하셨고 격이 없는 절친한 사이이셨는데 나는 그 분들의 대화와 친교에 자연히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스승님과의 관계로 인해 인간적으로 평생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 그 분은 제가 신학교를 마치고 군목으로 복무할 때 후원해 주셨고 모교인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1967년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불러 근 30년간 봉직하게 하셨다. 또한 가정적으로는 우리 내외의 약혼식을 비롯하여 첫째와 둘째의 결혼식 및 셋째의 약혼식을 주례해 주셨다. 또한 저명한 피아니스트이셨던 정비다 사모님은 내 여동생을 가르쳐 명문대학에 입학시키셨다. 이렇듯 스승님 내외분은 제자 하나를 키워 길을 열어주시고 동료로 만드시며 가족들까지 돌보아 주셨다. 스승님은 처음 대하면 매우 냉철하고 원칙주의자 같은 인상을 풍기신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사랑과 인간미가 넘치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이시다. 그분이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정중하고 친절한 동시에 친밀한 분들에게는 유머로 기쁨을 선사하신다. 스승님의 말씨는 자녀와 동생들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누구에나 존칭어를 쓰시고 사람들에 대해 칭찬은 하실지언정 비난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1960년 대 전후에 신학교 교수로 계신 가난한 시절에 누구를 만나거나 접대비는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셨고 한 평생 대접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계시다. 또한 학비와 기숙사비가 없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분은 대학, 교회, 사회 등 어느 곳에서 만났던지 절친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는 물심양면의 관심과 배려를 통해 그 관계를 평생 이어가는 것이다. 총장직에 선입된 직후 아는 교인을 위해 보증을 섰다가 집을 잃었기 때문에 해직되었을 때 이사할 주택이 없어 곤혹을 치르기도 하셨다. 스승님의 삶 속에는 정직이란 원칙이 배어있다. 그 분은 공사를 막론하고 입학이나 인사문제에 있어서 정직의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으셨다. 연세대학의 총장으로 11년 봉직하시는 동안 총장의 재량으로 대학에 도움이 될 만한 입학허가는 물론 내규로 하자가 없는 자녀의 입학과 유수한 학자인 동생의 교수초빙도 단호히 거절하셨다. 지금처럼 은행 카드가 없던 시절에 총장이 회의 차 국내외로 출장할 때는 여비를 현금으로 지불하였는데 귀임 즉시 잔액을 재무과에 반납함으로써 직원들을 놀라게 한 일화가 있다. 군사정권은 정부시책에 불응하는 총장을 해고할 구실을 찾으려고 세 차례나 재정 감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느 단과대학이 연구비로 냉장고를 구입하였다는 것 한 건뿐이었다. 스승님은 목사와 감리교 감독으로 교회발전 및 선명회 회장으로 복지사업 등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지만 아마도 가장 큰 공헌은 교육을 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은 평양 성화신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교수하시고 또한 연세대학교에서 장기간 총장직을 수행하시면서 인재를 발견하여 국내외적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많은 지도자들을 육성한 교육자이시다. 그 분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대학 및 직업대학원의 신설과 교수의 질적 향상을 위한 박사학위 소지자의 임용 등 행정력의 발휘로 대학의 발전과 학문의 수월성을 제고하셨다. 특히 스승님은 반정부 교수들의 복직과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복학을 반대하는 정부에 불복하면서 그들을 복직 및 복학시킨 교육자인 동시에 큰 스승이시다. 세 차례나 재정 감사를 하고도 총장의 부정을 밝히지 못한 군사정권은 총장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면 폐교조치를 취하겠다고 재단이사회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스승님은 대학의 존폐 앞에서 1975년 4월 사의를 표하셨고 그 다음 날 약 4천명의 학생들이 극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며 일간들은 박대선 총장의 정의의식과 살신성인의 정신에 대해 대서특필하였다. 나는 1967년 3월 연세대학교 교목의 일을 시작하였다. 불러주심에 감사하면서 직위나 봉급에 관한 것을 일체 묻지도 않고 무조건 부임하였다. 그런데 연세대학교는 나의 모교가 아니고 수많은 교직원 가운데 지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총장의 제자인 나는 몸가짐이 매우 조심스러워 가급적 총장 주변에 근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교목실장 직을 맡으면서 행정상 면담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실례인줄 알면서도 스승님에게 혹시 누가 될까 염려하여 가급적 전화로 용건을 말씀드리곤 하였다. 이것은 사제의 관계나 총장과 교목실장의 관계로 볼 때 당시 학원의 관료적 풍토에서는 무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승님은 관용과 이해로 나의 생각을 존중시하고 밀어 주셨다. 나는 스승님이 부서의 책임자들에게 재량권을 주신 것에서 넓은 도량과 지도력을 볼 수 있었다. 교목실의 주 업무는 대학의 채플과 대학교회를 관리 및 운영하는 것이다. 우선 나는 학생들이 기피하는 채플 프로그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소위 실험예배라고 하여 전통적 예배 대신에 연극, 안무, 대화, 영화 등 예술을 통한 복음 선포를 채플에 도입한 것이다. 그것이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예배가 아니란 이유로 관련된 여러 대학과 부서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총장의 재량권을 위임받은 이상 나는 그대로 추진하였고 결과적으로 실험예배는 연세대학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또한 1970년 초엽부터 군사정권이 대학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학기마다 반정부 데모는 그칠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채플의 사명이 연세대학의 기독교 정신인 “진리와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고 김재준 목사, 함석헌 선생 등 정신적 지도자들을 모시고 학생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압력은 말할 수 없이 악랄하였다. 나에게 채플운영과 두 개의 반정부 학생 서클의 지도교수란 책임을 물었는지 1975년 6월 학교당국에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통고를 받고 해직되었다.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일이었고 스승님이 해직에 뒤이어 내가 해직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드렸다.스승님은 1975년 4월에, 저는 6월에 해직된 이후 오늘날까지 개인적으로 또한 친교 모임을 통해 자주 만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생 건강하셨는데 90세를 넘기시면서 지난해부터 점점 쇠약해지시고 병원 출입이 자자저서 크게 염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와 유머를 잊지 않으신다. 진곡 박대선 스승님의 돈독한 신앙에 기초한 백절불굴의 정신, 성숙한 인간성 및 철저한 교육자의 사명이란 스승 상(像)이 모든 후진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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