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김 순 배 - 피아니스트 ]

 
음악평론 바로 전 날 일주일에 걸친 대장정을 끝낸 피아니스트는 그러나 전혀 피곤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뿌듯함으로 오히려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지요. 그의 곁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동행하는 부인 윤정희 여사도 연주자 못지않게 고양(高揚)된 얼굴이었습니다. 작년 12월 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서른 두 곡을 7일 간 완주하는 큰 프로젝트를 마친 백건우 선생과의 만찬에 초대된 그 날은 제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웬만한 클래식 팬들이라면 열성적으로 쫓아 다녔을 그 전무후무한 연주시리즈가 끝난 바로 그 다음날 아주 사적인 자리에서 선생을 뵐 수가 있었으니까요. 연주회에 앞서 발매된 EMI 레이블의 ‘백건우 소나타 전집’의 리뷰를 제가 썼었고 그 글을 인상 깊게 읽으신 토탈 미술관의 정청자 이사님과 부군 되시는 건축가 김성국 선생님이 마련한 자리에 제가 초대된 것이지요. 모두 음악애호가들이시며 후원자이신 분들 가운데 유일한 피아니스트였어서일까요? 백선생님은 저를 보며 베토벤 소나타 중 가장 난삽한 대곡인 29번 ‘함머클라비어’의 마지막 코드를 제대로 못 짚어 당황하셨다는 애기를 너무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비르투오소(virtuoso)의 반열에 오른 환갑이 넘은 피아니스트가 이렇듯 스스럼없이 베토벤 전곡 완주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모습이 우선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알피니스트들에게 히말라야 16좌가 그러하듯 피아니스트들은 끊임없이 32곡에의 등정을 시도하거나 꿈꾸며 산다. 그리고 그 도전은 피아니스트를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는 확실한 코스이다. 소나타 전 32곡을 일거에 정복해보겠다는 것도 강렬한 음악적 유혹이다. 이미 국내외의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거사를 성사시켰고 지금도 간단없이 이 작업은 진행 중이다. 그런데 백건우는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고 했다. 특유의 열정으로 주요 작곡가들의 작품세계를 ‘통째로’ 제시해주기를 즐기던 그가 베토벤만큼은 보류했었다. 기존의 해석이나 연주방식의 전형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내면에서 무르익을 만큼 익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언어가 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자신만의 베토벤을 내보일 수 있을 때까지 이 건반위의 구도자는 가늠할 수 없는 작품들의 심연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던 것이다.......” (김순배 ‘백건우 베토벤 소나타’ 리뷰中에서...) 와인과 함께 흐뭇한 만찬이 시작되고 선생 내외는 이번 연주에 얽힌 여러 비화들을 통해 모국 연주의 보람과 고충을 풀어놓았습니다. 한국 연주 직전에 중국 베이징에서 가졌던 같은 프로젝트가 끝난 후 열광한 중국 음악팬들이 선물한 마치 대중음악의 아이돌(idol) 스타에게 하듯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로 다소 촌스럽지만 정성껏 만든 달력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감동을 숨기지 않는 내외의 모습은 미소를 머금게 하기에 족했지요. 한편 우리 기획사의 다분히 상업적인 자세 등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할 때는 이분들의 전폭적인 예술가적 순수함을 감당하기에는 우리 클래식 음악계 시스템은 너무도 단세포적이고 격이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선생은 한국의 음악계에서는 연주자들이 너무나 당연히 병행하고 있는 학생 가르치는 일, 즉 제자들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연주만으로 ‘생업’을 삼고 계신 분이지요. 한국인으로서는 가히 ‘희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시는 이유를 (사실 우문(愚問)이지요.) 물으면 선생은 잠시 생각하는 낯빛을 하시다가는 이내 ‘제 시간과 에너지를 저의 연주에 쏟고 나면 남는 게 없거든요!’라는 현답(賢答)을 하십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백선생의 거주지는 한국일 수가 없겠다는 생각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만찬의 자리에는 선생이 한국에 올 때마다 자신의 집을 연습장소로 제공하며 현실적인 모든 면에서의 배려를 아끼지 않는 가히 한국의 ‘메디치(Medici)家’라 할 만한 그룹의 회장님도 동석하셨기에 이런 조용하고도 충실한 후원자들이 우리나라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도 했지요. “....백건우는 이 베토벤 전작시리즈를 통해 흩어진 소나타들, 그 대통합의 장을 만들었다. 각기 분산되어 존재하던 소나타들의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한 번의 등정코스가 될 수 있음과 그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확인시켜 주었다. 그 숱한 봉우리와 골짜기들을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로 주파한 사실 앞에서 모두는 적절한 수사(修辭)를 내어놓기 힘들다. 누구라도 비슷한 시도는 할 수 있다. 편법을 써서라도 억지 등정은 해내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백건우의 쾌거는 어느 누구의 그것과도 같지 않다는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백건우만의 베토벤을 제시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안다. 오랜 세월 인고의 기다림과 처절에 값 하는 수행이 왜 굳이 이 大피아니스트에게 필요했었던가 하는 것을.” (김순배, ‘리뷰’ 中) 바로 제 옆에서 랍스터(lobster)를 뜯으시는(!) 선생께 저는 베토벤 소나타의 해석과 연주에 대한 음악적인 질문을 드렸습니다. 백건우 선생의 어조는 결코 유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눌합니다. 그는 얘기하기 전 생각을 정말 골똘히 합니다. 그리고 결코 대답을 회피하는 법이 없지요. 그래도 그는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 사실 그의 연주, 이미 경지에 오른 그 분의 연주란 언어자체를 무색케 만들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얘기’를 듣고 싶은 저 같은 백성은 언제나 있는 법! 저는 그날 지근(至近)거리에서 맞닥뜨리게 된 한 진솔한 예술가의 생각이 정말 궁금했었습니다. 선생과 길지 않은 시간 오고 간 대화를 통해 저는 ‘백건우와의 대화’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선생은 물론 음악으로, 연주로 필요한 말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진 양성도 하지 않는 그 분의 음악적 견해나 아이디어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채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한 음악도로서 안타까운 심정이었지요. 우리가 접하는 그 분의 매스컴 인터뷰들은 사실 매우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타 예술 분야에서는 한 출중한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대화집이나 기록들이 아쉽지 않는데 비해 음악계의 사정은 별로 좋은 편이 못되지요. 바로 백건우 선생 같은 분의 음악생각을 우리는 좀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음악 하는 제 친구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부인 윤정희 여사를 존경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저 피상적으로 우리가 연예인에 대해 품었던 모든 왜곡된 관념들을 통째로 불식시키며 훌훌 자유롭게 한 예술가의 전폭적 동반자로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분이니까요. 여사는 정말 선생께 헌신적입니다. 제가 글 조금 쓴다고 하자 선생에 대해 쓴 모든 글들을 읽기 원하더군요. 백선생에게는 윤여사가 있어서 우리 모두는 안심이 되며 흐뭇합니다. 헤어질 때 선생께 제 부친의 시집을 선물했습니다. 백선생님은 그 책을 소중히 가슴에 껴안고 가셨습니다. 저는 진정한 한 시대의 예술가를 만난 벅찬 느낌에 밤 깊은 거리를 흥분한 채로 운전해 집으로 돌아 왔고 그 여운은 오래도록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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