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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

성서와 문화 2010.03.30 12:38 조회 수 : 1360

[ 작성자 : 최 종 태 - 조각가 ]


1940년 4월 나는 읍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와 삼촌이 동행했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의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셨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에다 이름표를 달았는데 하얀 천에다 붓으로 썼는데 아마도 삼촌 글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좥江本鍾泰좦 위에다 일본 가나글씨로 가와모도가네야스 라 특별히 일본식으로 썼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도 그 입학하던 날의 운동장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맨 처음 입학생이 된 것이었다. 그 전에 어느 날 내가 마루에 있는데 멀리 논산에서 일가 어른이 할아버지를 찾아오셨다. 무언가 심각한 말씀을 나누셨는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나도 짐작하였다. 우리 최(崔)씨 네가 개명(改名)을 해야 하겠는데 강화가 본(本)이니 후손들이 기억하기 좋게 강본(江本)이라하고 부르기를 좥에모도좦라 하였다. 그리하여 해방 되던 날 까지 내 이름은 에모도 쇼따이였다. 그 해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해서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 시작되었다. 내 위 학년까지는 조선어 시간이 있었다는데 우리 때부터 그 시간이 없어졌다. 일본말 책으로 배웠는데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그 때 형편을 기억할 수 없다. 2학년부터는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선생님한테 크게 주의를 받았고 그 뒤 언젠가 부터는 조선말은 학교에서 절대 금지였다. 어쩌다가 말실수를 해서 치도구니를 맞는 수가 부지기수였다. 나는 6년 동안 조선말로해서 혼난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말을 잘 안하는 성품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점점 위급해 지는 것 같았다. 신문 방송은 매일같이 승전보만 울렸지만 우리학교 교사는 일본 군인들의 숙소로 쓰이게 되었다. 우리는 향교(鄕校)로, 그 밖에 창고 같은 데를 전전하면서 칠판 갖다놓고 그래도 공부라는 걸 하였다. 전교생이 군대식으로 편성 되였고 목총 들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애국소년단을 만들고 식량증산 퇴비 모으기 등 아침저녁으로 바빴다. 소나무 광솔 따서 기름 만드는데 동원 되였다. 어느 봄날 학교 앞 보리밭 밟기를 하였다. 어쩌다가 때 이른 뱀이 나왔던 모양이다. 어떤 친구가 좥뱀 봐라!!좦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불려 나갔는데 일본교장이(당시는 군인장교이었다.) 학생들 보는 앞에서 낫으로 머리를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 집은 시골이 다 그렇듯이 농사를 하였다. 벼 심고 타작하고 각종 농사일 안 해 본 것 없이 다 하였다. 영 엮어서 지붕에 올리고 짚신도 만들었다. 여름 겨울 농한기에 우리 할아버지는 붓을 만드셨는데 나도 가끔 옆에 붓 만드는 일을 재미 삼아 하였다.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는 그것을 말리지 않으셨다. 실수도 했을 것이 것만 쳐다보면서 일체 말이 없으셨다. 털 고르기부터 대나무 잘라서 또르르 털 들어갈 구멍 만드는 일도 재미있었다. 한번은 가을 농사가 끝났는데 우리 집 소달구지에 벼 가마니를 가득 싣고 면사무소 마당에다 갖다 바쳤다. 이른바 공출이라는 것 이였다. 농사한 것을 얼마씩 나라에 바치는 제도였는데 면사무소 마당에는 벼 가마니가 산 같이 쌓여있었다. 공출하는데 어린 내가 따라 갔던 것이 아니었을 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면사무소 마당은 여기저기에서 싣고 오는 벼 가마니를 정리하는데 분주하였다. 그러고서 식량배급 이라는 게 있었는데 만주에서 가져왔다는 콩깨묵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냇가 모래밭에 가면 쇠비름풀이라는 게 있다. 억세게도 잘 자라는 풀이였다. 삶아서 고추장에 버무려 먹으면 참으로 맛이 좋았다. 요즘은 그 걸 먹는 사람들이 없다. 왜 그렇게도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혀끝에 그 맛이 삼삼하다. 궁 즉통이라고 워낙 어려운 시절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싱가포르가 함락되었다고 고무공도 선물 받고 일본 떡도 얻어먹고 우리는 군가를 부르며 매일 같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에 의기양양하였다. 교육헌장을 외우느라 진땀을 뺐었다. 학교 문 옆에 신사(神社)를 만들어 놓고 등교할 때 퇴교할 때 절하고 손뼉을 세 번 치는 예를 바쳤다. 빼먹었다가 들키면 역시 기합 이였다. 학교 문 밖에만 나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조선말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신작로 길을 때로는 산길을 타고 놀면서 동네로 돌아왔다. 그런 때면 우리는 완전히 조선사람이었다. 미국사람 영국 사람은 귀신 도깨비라 하여서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뒷날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 왔는데 좀 이상하기는 해도 귀신 도깨비 같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점점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마을마다 부인네들이 모두 나가서 소방 훈련을 하고 흰 저고리에 검은 바지(몸뻬라 하였다)를 입고 물동이(바겟츠)들고 훈련하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같이 떠오른다. 일본군인들 한 부대가 어디서 자폭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야마모토(山本)장군이라 하였는데 나는 습자(習字) 시간에 시키지도 않은 야마모토 장군을 추모하는 글을 멋지게 썼었다. 나는 붓글씨를 잘 써서 상도 받고 우리 학교에서는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었다. 위문그림도 그리고 위문편지도 쓰고 그런 일을 매년 몇 번씩 하였다. 학도병이란 것은 몰랐지만 이웃에 징용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웃집 누나들을 서둘러서 시집보낸다고 수군수군하였다. 학교운동장은 온통 고구마 밭으로 바뀌었다. 워낙 넓어서 학년마다 구역을 나누어 담당 하였다. 우리 반 몇몇 친구는 일본군인들 하고 잘 놀았다. 그네들은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훈련을 독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뭘 하고 지냈는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떤 군인은 뱀도 잡아먹고 어떤 군인은 마늘을 먹고 온몸이 빨갛게 되기도 하였다. 한 군인은 애를 낳았다고 자랑을 하였는데 우리학교에 온지도 일 년이 넘었는데 부인이 어떻게 아들을 낳았을까 이상하였다. 듣고 보니 고국에 동생이 있는데 형이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동생이 낳아주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1945년 8월 15일. 그 날은 일요일 날이었다. 우리는 6학년이었다. 마침 운동장 고구마 밭 물주는 당번이 우리 반 담당이 된 것이었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 우리는 물주기에 열심이었다. 그 날 열두시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열두시 가까이 되었는데 일본 군인들이 모두 숙소(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또 그 무더운 날이었는데 창문을 모두 닫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모든 유리창들이 열렸다. 군인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방송일까 우리들은 궁금하였다. 더러는 군인들이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한 친구가 알아보고 말하기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덤덤하였다. 조금 있다가 조선사람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우리를 다 모이게 손짓하고 오늘은 일 그만 한다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우리는 좋아라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집으로 갔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처음 들어보는 것도 신기하였다. 우리 집 앞에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더울 때면 온 동네사람들이 그 그늘 아래에서 낮잠도 자고 하였다. 그 날은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었다. 모두가 흰 옷이었다. 푸른 나무 밑에 하얗게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가 마당에 계셨다. 나는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철난 소리를 한 번 하였다. 일본이 졌다는데 그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더 알고 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분명 일본은 전쟁에서 진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 살던 일본 사람이 본국으로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된 조국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세상은 확실히 뒤바뀌었다. 일본인 선생들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몇몇 조선인 선생은 마을 청년들한테서 얻어맞았다고 한다. 이웃 동네 면장네 집도 혼이 났다고 들었다. 학교가 새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가갸거겨를 배웠다. 참으로 신기하였다. 일주일도 안돼서 조선말 책을 좔좔좔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말에다 우리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작문(作文·글쓰기) 시간을 자주 하였다. 어떤 날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교탁 앞으로 나갔는데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기를 너는 글을 잘 썼는데 네 이야기를 쓰라는 훈계였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하는 걸 느꼈다. 암울하던 일제(日帝) 36년 압박과 설음. 민족의 자주독립……. 그렇게 신나게 글을 써 나갔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 맘을 잘 아시고 그 점을 꼭 짚어 낸 것인데 사실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고 독립운동 하는 김구선생 이승만 박사를 내가 알 턱이 없었다. 그 때보다도 뒷날 또 뒷날 나는 두고두고 반성하였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고 대한민국이라 하였다. 미군들이 이 땅에 들어오고 백인도 보고 흑인도 보았다. 자유당 민주당이란 것도 보고 6·25전쟁. 피난살이도 겪었다. 3·15부정선거. 4·19학생혁명! 5·16군사사건. 10월 유신. 대통령의 시해. 민주화의 봄. 5·18광주항쟁. 전두환 군부정권의 재등장……. 그런 속에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고 정년퇴직을 하고 그 후 또 10년을 지금 살고 있다. 번번이 어려운 사건 앞에서 나는 고민하였다. 나는 항상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해방 되던 날 일본이 절대로 질리가 없다고 확신한 오판. 그 두 달 뒤 글쓰기 시간에 일제 36년 압박과 설음을 읊었던 실수. 다시는 그런 오판과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후배들이 나와 같은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않게끔 늘 관심하였다. 참 어려운 시절을 용케도 살아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은 험하고 목숨은 질기고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슬픔도 고통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었다. 이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