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박영배 - 편집인 ]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20세기 초 1차대전의 파국을 딛고 새롭게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종교가 반드시 이성(理性)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자 편에 서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계시의 최후의 기준은 성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 편에 선다.
그의 신학의 방법은 ‘질문과 회답’의 형식이다. 질문은 언제나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나오는 문제며, 이것에 대한 회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다.
틸리히는 '경계선상에서'(On the Boundary)라는 자전적인 글에서 자기는 운명적으로 12의 경계선상에 세워져 왔으며, 그것은 자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있어서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12의 경계선이란 아버지의 기질과 어머니의 기질, 도시와 시골, 부르주아 계급과 프로레타리아 계급, 현실과 상상, 이론과 실천, 타율과 자율, 신학과 철학, 교회와 사회, 고국과 이국 이라는 두 가지의 이질적 영역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상과 같은 경계선상에 선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이점(利點)이 있지만 동시에 대단히 불안전한 상황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경계선이야말로 인간의 실존 상황이 들어나는 장소이며, 또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로 그의 일생은 서로 대립하는 두 영역 사이에서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통합시키려는 긴장 속의 삶이었다.
틸리히에 의하면 진리는 플라톤에서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념(Idea)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견된 것이며. 필연과 자유의 항쟁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역사란 순환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직선을 그리며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역동적인 사상은 그가 태어난 19세기 말의 신학적 정신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19세기는 비교적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부르주아 문화가 번영한 시대이다. 그러나 그 말기에 가서는 사회적 정신적 붕괴의 징조가 나타나며, 혁명적 세력이 대두된다.
그러나 틸리히는 20세기 세계 속에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비인간화(非人間化)의 과정으로 부터의 구원의 길은 여전히 19세기 문화에 저류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적 인도주의(人道主義)의 힘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틸리히는 ‘문화신학’의 서문에서 종교와 문화는 언제나 관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종교란 인간의 삶의 한 특별한 영역이나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생활의 모든 기능에 있어서의 깊이의 차원이다. 즉 종교는 인간의 지성, 감성, 의지, 그 모든 것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인간정신의 다양한 모든 기능의 가장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인간의 많은 의미행위(意味行爲)로서 성립되며 그 많은 의미 행위를 기초하는 근원적 의미가 종교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틸리히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주제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문화의 뿌리는 종교요, 종교의 열매는 문화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와 문화의 종합은 틸리히의 종교철학과 예술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틸리히의 신학 속에 예술은 크나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성(聖)과 속(俗)의 두 영역이 만나게 되는 장소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사람들에게 화가들과 소설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작품을 숙고하기를 권한다. 그는 신학자나 사회학자가 쓴 교과서보다 피카소나 고흐나 뭉크와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연구함으로 우리는 문화와 종교에 관하여 보다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예술은 틸리히의 관심의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신학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틸리히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소년 시절의 꿈의 발단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후에 시각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회화에 대한 열정으로 발전되었다.
그는 ‘경계선상에서’ 라는 글에서 ‘예술은 유희의 최고의 형식이며, 상상력의 순수한 창조적영역이다. 창조적 예술의 분야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나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의 신학적 철학적 작업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져왔다’라고 말하고 있다.
틸리히는 철학적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도 예술과 학문은 늘 그의 삶에 양 바퀴와도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돌이나 철이나 유리 대신에 개념의 명제(命題)에 의해 건조(建造)할 것을 결단했다. 점토에 의해서든 사상에 의해서든 건조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방법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인생 전체의 의미에 대한 어떤 하나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예술에 대한 동경은 또한 문학에도 지극한 관심을 기우렸다. 섹스피어, 괴테, 릴케 등의 작품은 그를 깊이 감동시키며 그의 독자적 신학발전에 공헌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자전적 기술에 의하면 건축물과 문학에 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회화(繪畵)야말로 그의 미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틸리히의 회화에 대한 관심과 미술사에 대한 탐독은 1차대전 중 전투가 벌어지는 참호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틸리히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파괴와 형성의 시기였다. 그는 전쟁의 공포와 추악과 파괴 속에서 필연적 반동(反動)으로서 회화는 그에게 기분의 전환과 심리적 안정을 갖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전시(戰時)중 베를린에 있는 미술관(Kaiser Friedrich Museum)에서 우연히 보티첼리(Botticelli)의 ‘성모자와 8인의 천사’의 그림을 마주했다. 그것은 틸리히에 있어 놀라운 경험이었다. 보티첼리의 그림은 마치 계시와 같이 틸리히로 하여금 예술의 세계에 눈뜨게 했다. 그는 이 완성미 넘치는 성모상 앞에서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시각예술의 미와 힘에 압도당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실재(Reality)에 사로잡힌 체험으로서 그것은 실로 계시의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 그 자체를 보았다. 그것은 흔히 보는 종교의 주제들이 아니라 그 그림의 색채, 구성, 표현, 조화 등이 하나가 되어 절대적인 그 무엇을 전해 주었다.
그 후 틸리히는 친구이며 예술사가인 Eckart von Sydow를 통하여 놀데, 뭉크, 키르히너, 쉬미트 등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을 알게 되었다. 표현주의 예술은 자연의 사물의 형태를 파괴함으로 사물의 본질이나 그 깊이를 보여준다고 틸리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표현된 신비적인 것은 천상적(天上的)인 초자연의 힘의 개입이 아니라 이 세상의 현실 가운데 있는 인간의 혼(魂)의 깊이로부터 분출되는 사물의 내적인 진리의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근대 예술사에서 보는 표현주의는 틸리히가 말하는 것같이 통일되고 정돈된 운동으로서 서술 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표현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시대의식 그 자체였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 예술가 그룹인 ‘다리파’나 후렌츠 마크(F. Marc)가 가담해 있는 ‘청기사’를 형성한 예술가들은 분명히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화면으로부터 벗어나 선이나 색체를 강하게 확장하는 방식과 형태상의 변형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주관적인 내면의 감정 표출을 가장 간소한 형식으로 표현하려는 반자연주의적(反自然主義的)인 주관주의(主觀主義)의 시도였다.
틸리히는 ‘현대 종교적 상황’이란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정신적 상황을 분석하면서 그 특성으로 인간의 자족성(自足性)과 유한성(有限性)에 대한 신앙을 들고 있다. 그리고 자기에 안주하려는 유한성이라는 속성은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거부해 왔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으로 부터의 탈피는 20세기초 그림에서부터 먼저 나타난다. 즉 표현주의라는 그림의 경향이 이러한 사실을 나타내는 특징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는 표현주의와 그 이전의 예술양식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정신의 순수한 산물로 나타난 자연주의 또는 인상파의 경향은 19세기 중반 이래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한 놀라운 힘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여러 형식은 자연주의에 있어서는 객관적 방향으로 또 인상파는 주관적 방향에서 그 어느 것이나 자기 속에 안주하는 유한성을 지닌 형식들이다. 거기에는 시간적 순간의 인상의 포착과 천재적 형식의 창조의 힘은 있으나 영원한 것에 대한 돌입(突入) 즉 주관과 객관의 대립의 피안에 있는 실재의 돌입은 어느 것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
틸리히는 생애를 통하여 다종다양한 예술양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으나 그 중에서 그에게 깊이 그리고 연속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표현주의였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종교적 예술은 곧 표현주의이며 그 종교적 예술의 최소한의 조건은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황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제시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예술론은 표현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칭찬과 찬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술은 객관적 고찰에 고심하지 않기에 과학이나 철학보다 더 직접적으로 한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제시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