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8년 성서와 문화

[ 작성자 : 아랑 김 현 옥 - 언어학 / 남 일리노이 주립대학 교수 ]


<ㄱ>
갈래가 다른 나라의 낱말이 발음이 엉뚱하게 한국말 같아서 우스울 때가 있다. 가령 영어의 many가 ‘많이’와 비슷한가하면, ‘두 손자’하고 two sons하고 위아래 세대가 한 차래 다르기는 하나 그런대로 통하는 데가 있어서 우습다.
나는 프랑스사람들이 voil?! 할 때 마다 곧 잘 우리말의 ‘봐라’로만 들려서 남몰래 웃음을 참곤 한다. voil?는 무엇을 본다는 ‘voir’의 2인칭단수의 명령형 voi에 장소의 부사 l?(거기)가 유착해서 관용화된 것이어서, 마법사가 요술을 부려 무엇을 내 놓아 관객 앞에서 깜짝 놀라게 할 때 voil?! ‘자! 이것 보세요!’ 한다. 그러니, 꼭 우리말의 ‘봐라’로 들릴 밖에. 내 말이 경상도 사투리라 ‘봐라’나 ‘보래이’가 입에 붙어서 더욱 더 그런 것이 아닐까 해보기도 한다. ‘보래요’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데, 이것은 경기도나 그 보다 더 북쪽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듣는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이것 좀 봐요’ 하는 뜻으로 쓰는 것이 주가 되니까, 엄격하게 따지면, voil?와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다. 그렇긴 해도 용하게도 닮아서 우습기만 하다.
일본사람들은 이럴 때 ‘호라, 고래 미나’ 하는 데, 글자 데로 하면 ‘봐요, 이것 봐요’가 된다. 첫머리의 ‘호라’와 우리가 ‘이것 좀 보래니까’ 할 때의 ‘봐요/봐라’와는, 호칭의 문법으로 보나, 의미상의 뉴앙스로 보나, 어두음의 ‘ㅂ’과 ‘ㅎ’만 빼면 잘 못 알아 볼 만큼 흡사 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일본어의 ‘ㅎ’은 우리말 같은 후두마찰음이 아니고 영어의 ‘f’에 가까운 소리이어서 조음(調音)상으로는 우리말의 ‘ㅂ’과 일어의 ‘ㅎ’은 둘 다 양순음(?唇音)에 속하며, 전자가 파열음(破裂音) 후자가 마찰음(摩擦音)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라, 혹시나 일어의 ‘호라’가 우리의 ‘보라’하고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실인 즉, 일본의 가장 오랜 문헌으로는, 신라왕국 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나타난 첫 일본왕조 나라조(奈良朝)시기에 두 권의 사기와 가집을 들 수가 있는 데, 여기에서 그 당시의 일본말의 발음을 엿 볼 수가 있다. 신라 향가의 이두표기법을 따른 ‘만엽 가명(万葉 ?名)’ 한자에는 ‘ㅎ’소리는 모조리, ‘파팔파파비비필비불포부폐평변부본품번(波八巴婆比卑必非不布賦幣平?富本品煩)’등으로 표기되어 있어 한눈에 ‘ㅂ’과 ‘ㅍ’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즉 현대 일본어의 ‘ㅎ’은 고대에는 우리말 같은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흙을 파다’의 ‘파다’를 ‘포루( >호루)’라 하고, 벌판의 ‘벌’, 혹은 ‘뻘’은 ‘파라 ( >하라)’, ‘뼈’를 ‘뽀네 ( >호네)’, ‘밭’은 ‘파다( >하따)’, ‘밧틀’은 ‘파또리( >핫도리)’, ‘바늘’은 ‘파리( >하리)’로 되어 있었다.
우리 춘향이가 들었으면 질색하고 “애고, 참 잡셩시러워라”할 프랑스말의 baiser 나 영어의kiss에 비하면 청순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네 ‘뽀뽀’는 일어의 ‘뺨’에 해당하는 ‘호호’, ‘호빼따’ 혹은 유아어로 ‘호빼’에 연결이 되겠다. 이래서, 일어의 ‘호라’를 우리말의 ‘봐라’에 대비시키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고대 일본어에 ‘본다’는 뜻으로 ‘보’를 어간으로 하는 동사도 있었으려니 짐작이 된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런 동사를 문헌에서 찾아 볼 수가 없고, 본다는 뜻으로는 한결같이 ‘미루’가 보일 뿐이다. (그 밖에 ‘나가무(眺)’란 동사가 있기는 하나 ‘바라보다’로 뜻이 좀 멀어진다.)
아무리 소리 모양이 비슷하고 의미상의 유사성이 높다해도 ‘보아라’의 바탕이 되어 줄 ‘보다’에 대응하는 동사가 없고 보면, 결국 프랑스말 voil?!와 ‘봐라’와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 되고 만다. 어쩌면 고대 일본어에 우리말의 ‘보다’와 줄기를 같이 하는 말이 한 때 있었다가 ‘미루’란 또 하나의 동사 때문에 ‘보다’ 계통이 밀려나 간신히 오늘날의 ‘호라’로 화석화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나 해 둘 수밖에 없겠다.

<ㄴ>
우리말에 대해 의문이 있을 때면 의래 만만하게 장거리 전화로 괴롭히곤 하는 옛 공군 동기의 시인친구 하나가 플로리다 주에 살고 있다. 일전에도 위에 말한 Voil?/‘봐라’를 가지고 한참 웃어대다가, 언제나와 같이 급속도로 변해 가는 우리말이 또 한 차례 화제가 되었다. 사전편찬 작업에 종사한 일이 있는 이 시인을 보면 실험실에서 가장 높은 순도의 물질을 석출해 내는 순백 가운의 화학자를 연상시킨다.
시인들이란 다 그렇겠지만, 그는 시작에 쓰이는 언어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갈고 닦고, 혹은 무엇을 정류기로 걸러 내 듯 한 것을 다음에는 가리고 가려 한 구절 한 구절을 돌을 쪼아 새기듯 하여 한편의 시를 엮어낸다. 구독점 하나도 시 전체의 질서 속에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어 함부로 빼돌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이고 보니, 요즈음의 한국말에 섞여 들어오는 낯설은 표현들로 한국말이 엉뚱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면 부화가 치밀어오를 만도 하겠다.
그가 틈틈이 기록해 모아 놓은 이런 따위 용어에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인다. ‘의상(옷차림) 참 멋진 데요,’ ‘그 가수 배우로 변신(전향)한 것 몰라요?’ ‘표정관리 좀 잘 하세요,’ ‘이번 대결(시합) 잘 해,’ ‘우승의 고지를 향해,’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 (자랑)이다,’ ‘잘 숙성시킨 (익힌) 김치,’ ‘아이쿠, 새 반지 착용했네 (꼈네),‘ ‘오늘 새벽 두시반에 장박사가 환자의 사망선고 (사망진단)를 내렸다,’ ‘분위기 좀 연출해 보세요,’ ‘이 약주 맛 직접 (몸소) 확인해(알아) 보았습니까,’ ‘그것 참 환상적이(좋으)네요,’ ‘저이는 내 예비신랑 (신랑 될 사람)이야,’ ‘어젯밤 기습적으로 내린 눈 때문에 춘천지방이 눈에 점령당했습니다.’ 그리고, 장학퀴즈 텔리비죤 프로그램에는 ‘최강지뢰’와 ‘4연포’라 불리는 벌칙이 있다고 한다. 이런 유의 말들로 우리 시인친구가 노트해 모아 놓은 것만도 기백을 넘는다 하니, 한국 땅을 떠나 사는지가 어언 사십년이 넘는 나에게는, 실로 놀랍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저러나, 도대체 이런 부류의 말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 나온 것인가 궁금해진다.
여기에 든 예들은 모두 자연스러울 우리말 표현을 굳이 한문 표현으로 갈아치우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말을 한문식으로 바꾸는 경우, 가령 우리말의 ‘만들다’를 한문표현으로 바꾸려면, 다 아는바와 같이, ‘製作’, ‘制作’ ,‘製造’(제작, 제작, 제조) 같은 말에서 하나를 골라내야 하고, ‘創作’, ‘創製’(창작, 창제) 따위도 고려해야 함으로 어휘선택이 간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어서 자칫 잘못하면 원의를 그르치기 쉬운 것인데, 위 분단에 든 예들의 한어(漢語) 바꾸어놓기가 이 같은 잘못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이 보인다. 첫째는 바람직스런 말(v1)과 바꾸어 놓은 한문식 표현(v2)이 ((끼다) 착용), ((몸소)직접)에서와 같이 본래의 뜻보다 더 넓은 뜻을 가지게 된 경우(v1 < v2), 둘째는 거꾸로 (옷(의상)) 과 같이 바뀐 말이 더 좁아져 보이는 경우(v1 > v2), 셋째는 뜻이 아예 어긋나 버린 ‘진단’과 ‘선고’와 같은 경우(v1 ≠ v2)이다. 그런데, 셋째 경우는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첫째 경우도 둘째 경우도 다 같이 의미상의 내포관계에 오류를 품고 있어 짝짝이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반지를 끼다’가 ‘반지를 몸에 부치다’의 뜻으로, 즉, ‘반지 착용’으로 못 볼 것도 없지만, 이런 표현이 우리 플로리다 시인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긋난 ‘문자’ 쓰기가 바로 짝짜기 구두 신은 신사가 우습게 보이듯이 ‘반지 착용’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라 하겠다.
옷을 뜻하는 유식한 ‘문자표현’인 ‘의상’은, 좁은 의미로는, 배우나 가수와 같은 사람들의 ‘연기용 의상’을 가리키고 있어, 듣는 이를 배우 같이 아름답다고 은근히 추기는 숨은 뜻이 있어 재미는 있으나, ‘옷차림’에 대한 ‘옷 입은 태’나 ‘옷맵시’와 같은 표현이 가지는 짙은 멋은 잘려 나가고 마는 셈이 된다.
이런 따위 짝짝이 표현은 그래도 귀엽게 보아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자랑’이 ‘자존심’이 되고, ‘사망진단’이 ‘사망선고’가 되어버리면 한국말은 그야말로 ‘사망선고’를 받은 격이 되고 말겠다는 것이다.
땅을 치고 통탄해야 할 사람은 우리 재미 문인 한 사람이 아니고, 통곡해야 할 사람들은 한국말로 살아가는 우리들인 것이다. 빗나간 유식 ‘문자’ 쓰임이 당돌스러워서 우습게 여겨지는 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엄마 경대 앞에서 얼굴에다 분과 연지를 처바르고는 엄마 목도리와 발끝까지 내려 온 엄마 블라우스를 입고 엄마 하이힐 빼딱 구두를 끌며 나오는 광경이 어른들의 폭소를 자아낼 때와 같이, 본래의 의미역(意味域)을 벗어나는 어긋남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천진한 아이들의 장난처럼 이런 우스개 어긋난 표현들도 되풀이 되면 당초의 유모아는 사라지고 우리말 속에 마치 당연한 표현처럼 가라앉아 정착하게 될 수도 있겠다. 이래서 해괴한 새 표현 하나가 탄생한다.
오늘날의 우리말의 흐트러짐의 원인의 하나가 귀성 제대군인들의 말투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 같은 짝짝이 한문자가 섞인 군대용어들이 장난스런 익살로 쓰여지던 것이 어느새 퍼져서 현대 한국말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가령 일상생활의 갖가지 활동을 군대의 공문서말만 가지고 쓰라고 하면 내가 쓴 것은 위에 든 예문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글이 될 것이다.
핫바지에 넥타이식 말장난을 당연한 표현으로 사회가 진담으로 받아들일 때 웃음은 사라지고 언어의 해괴한 변질이 일어난다. 해방 된지 60년을 일당독재 아래에서 당의 강령에 입각한 교시문과 지령문서와 프로파갠다에 익숙 세뇌된 북쪽사람들의 말씨가 어떤 것이 될 건가 뻔한 일이다. 말이 소수의 집권층에 좌우되고, 그 뿐인가 약자인 백성은 으래 지배층 언어를 본뜨기 마련이니 북한말에 올바른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북 방송을 들으면 요란스런 전투적인 말투 뒤에 이미 사해가 된 한국말의 공허한 울림이 들려 올 것이다.
나는 한 때 한자를 전폐한 ‘로동신문’ 을 보고 그들의 용단에 감명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로동신문’은 그러나 한편 한자를 구사하여 새로운 어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길을 막고 말았다. 한국어에 정착한 한자어는 내린 닻이 되는 한자를 잃고 떠돌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의에서 벗어난 뜻으로 쓰여도 한자를 모르는 신세대 북한의 청년들은 쓰임의 잘못을 교정할 길마저 잃고 만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한문자에 의한 새로운 낱말의 창조적인 확장도 바라기가 어려워졌다.
여기에 비하면, 어찌된 셈인지 엎어져도 복만 받는 일본은 미일안전보장조약 덕분에 미국의 핵우산 밑에서 징병제가 없는 세상이 되어 적어도 군대식 말투의 유행으로 인한 말의 어지러움은 면해 있다고 하겠다. 십여 종을 헤아리는 문고판 출판의 융성으로 교양서적 문학 작품을 읽는 폭넓고 두터운 독자층이 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를 그네들의 ‘가나’체와 병용함으로 써 한자가 가지는 신통한 조어기능(造語機能)을 이용구사하여 어휘의 증대는 물론 어휘의 세밀화와 세련화에의 길도 트여있다.
한국학생과 일본학생들이 보내오는 편지나, 한국학생회와 일본학생회에서 펴내는 회지의 기사들을 읽어 보면 그들 사이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작문력의 질적인 차이에 아연해진다. 한국 학생들의 글쓰기를 이 모양으로 내버려두고 있는 한국 교육당국의 책임을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자가 없으면 없는대로 순연한 우리말의 테두리 속에서도 발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한자 전폐로 뿌리를 잃은 우리말 사전의 태반을 이루는 한자어에 바탕한 어구들이 엉뚱하게 달라져 갈 것을 생각하면 끔직스러워지는 것이다.
라틴어의 조어기능을 구사하는 세계영어는 오늘도 발전하고 있다. 근자에는 우리나라의 한문교육이 부활을 보아 어린이도 기본 한문을 공부한다고 듣고 있어 퍽이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터이다.

<ㄷ>
산천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말도 변해간다. 플로리다의 객지 시인의 노여움도 슬픔도 아랑곳없이 변해가는 것은 변해가고 만다. 오랜 먼 날 여름 한나절 어디선가 들려오던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는 잊을 수 있어도, 귀 따갑게 울어 대던 매미소리와 개구리소리를 영원히 잃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도 하며 안간힘을 다해 쐐기를 박는 것도 사람의 정이려니 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