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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片紙 ⅡⅩⅣ - 라흐마니노프의 ‘샤인’

성서와문화 2010.01.19 18:35 조회 수 : 1346

 
[ 작성자 : 김순배 - 피아니스트/음악평론 ]


‘그건 꼭 영화음악 같다’라고 하면 다소간 폄하하는 의미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드라마가 전개되는 화면의 보조 역할로나 쓰일 특별한 개성 없이 평이한 스타일의 음악을 말할 때였을 겁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느 요소 못지않게 업그레이드 된 이즈음의 상황에서는 적용되기 힘든 얘기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 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그런 평가의 범주에 놓인 적이 있었다지요.
그는 20세기의 중반까지 살았던 인물이지만 철저히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고수한 스타일로 인해 온갖 새로운 시도들로 들끓던 20세기의 음악적 기상도에서 역으로 예외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어디에선가 들은 듯 우리 귀에 익숙한 영화음악은 쉽게 라흐마니노프 스타일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극의 진행을 돕되 결코 귀를 거슬리게 하지는 않는 무난한 분위기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표상되는 라흐마니노프 스타일. 그러나 찬찬히 들어보면 그저 그렇게 범용(凡庸)한 영화음악과 라흐마니노프의 오리지널 작품과의 질적인 차이는 분명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오리지널 음악이 많은 영화들 속에서 너무도 ‘효과적’으로 사용되며 대중의 호응과 사랑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왜 많은 영화들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즐겨 찾는 것일까요? 그의 음악이 특별히 영화에 어울리는 종류의 것인가요? 왕년의 명작 ‘밀회(Brief encounter)’나 ‘랩소디(Rhapsody)’등을 비롯 최근의 ‘샤인’과 한국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뛰어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힘과 매력은 무엇일까요?
비장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의 빛깔은 진합니다. 고전 혹은 낭만적 어법에 충실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어법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적인 서정에 깊은 맥을 대고 있지만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감싸 안아주기에 충분한 깊이와 폭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터운 텍스쳐가 주는 착잡한 느낌과 그 틈새로 홀연 솟아오르는 맑은 멜로디 라인은 극과 극을 넘나드는 인간 정서를 표현하는데 아주 적합한 장치가 되어주지요.


그의 음악이 사용된 영화들의 목록은 일찍이 1932년에 만들어진 ‘Doctor X’(‘전주곡 C# minor’)로부터 시작하여 2006년의 ‘The History boys’(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에 이르는 긴 시간에 걸칩니다. 그래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젊은 관객들에게까지 확실히 알려지게 된 영화는 아무래도 2002년도 작품인 ‘샤인(Shine)’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비로소 대중들과 친밀해집니다. 지금까지 협주곡 2번이 영화에 쓰인 일은 많았으나 3번은 아니었지요. 향수를 자극하는 서정적인 유니슨으로 시작해 파란만장한 진행과정을 거쳐 시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끝나는 곡이 3번입니다. 맑고 투명한 선율이 돋보이는 고즈넉한 부분들과 삶의 격랑을 묘사하는 듯 몰아치는 부분들이 교차하는 이 곡은 그 자체로도 이미 한 편의 드라마적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지요.
우여곡절의 인생행로를 거쳐야 했던 한 신동 출신 피아니스트의 내면 역정을 그려낸 ‘샤인’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다분히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곡은 이 영화의 키워드이자 화두입니다.
주인공인 데이빗 헬프갓이 어렸을 때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지워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그의 뇌리에 남기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상징하는 피아노 연주의 최고상태) 을 향한 꺼지지 않는 도전욕을 불태우게 되지요. 아버지가 틀어주었던 음반 속의 도입부를 피아노로 더듬어 보는 데이빗의 모습은 그 단순한 주제 이후에 밀려올 거대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아직 알지 못하는 순진하고 불안한 어린 천재의 초상입니다.
유니슨으로 연주되는 1악장의 주제는 어린 데이빗에게 저 곡을 꼭 치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안길 만큼 달콤하며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의 향후 삶의 역정은 마치 달콤한 주제 뒤의 파란만장한 변주처럼 순탄치 못하게 펼쳐집니다.
이렇게 ‘Rah 3번’은 소년이 자라며 피아노와 대결하는 모습의 상징으로써 혹은 피아노라는 악기와 처절히 대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음악작품이 영화의 구조 및 전개와 맞물려 드라마의 구성원이 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지요. 실존 인물 데이빗 핼프갓과 이 ‘Rah 3번’사이에 얽힌 사연은 실화라 믿겨지긴 하지만 한 드라마의 음악적 키워드로서만 봐도 라흐마니노프 3번은 탁월한 선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헬프갓의 운명을 결정한 곡이었고 앞으로 다가올 삶의 이변과 격랑을 예견케 하는 곡인 동시에 실제로 헬프갓을 쓰러뜨리게 되는 운명적인 음악이 됩니다.
동시에 이 곡은 작곡자가 고국 러시아를 떠나 죽을 때까지 방황하게 될 생의 후반부를 일찌감치 암시해 주는 곡이기도 하구요.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을 러시아에 있을 때 만들어 놓았으나 정작 곡이 초연된 곳은 이국땅인 미국이었어요.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결과로 이 곡의 연주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서 죽을 때까지 향수(nostalsia)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유랑민들 혹은 러시아 정교의 찬트(chant)를 연상케 하는 도입부는 듣는 사람의 감성에 짙게 호소하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 곁을 떠나 외롭고 험한 외부와의 동시에 자신과의 부대낌에 휘말려 들어갔던 헬프갓의 삶을 표상하기에 충분합니다.


한편 영국의 명배우 길거드(John Gielgud)가 분한 한 팔을 잃은 로얄 아카데미의 피아노 교수 세실 파커가 회한에 찬 어조로 ‘나도 Rach 3번을 연주한 적이 있었지’ 라고 술회하며 헬프갓을 독려하는 광경은 이 음악과 영화 플롯과의 연결 관계를 더욱 세심하게 처리한 예가 되겠습니다.(이 老피아니스트의 레슨 광경은 물론 1950-60년대로 추정되는 시대상황에 걸맞게 다소 구식이긴 하지만 강렬한 임팩트는 확실하지요.)
‘샤인’에서는 한편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c# minor’가 흐르기도 합니다. 이미 많은 영화에서 비장함과 우울함으로 덮인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쓰였던 이 곡은 헬프갓이 쓰러진 후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며 마구 달릴 때 비통하게 흘러나옵니다.
영화 ‘샤인’은 단순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로 볼 수도 있겠으나 어릴 적 자신도 상처 받았던 가학적 아버지의 심리와 그것에 의해 역시 상처 받는 한 어린 영혼의 심층심리학적 애증관계가 더 흥미롭다고 여겨지며 여기에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영화의 내적 구조를 결정하는 필수 불가결의 요소로 참여했습니다.
영화 샤인의 진짜 주인공 아니면 적어도 첫째가는 조연은 어쩌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드라마의 구조와 전개에 결정적인 몫을 담당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깊고 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래 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싸구려 영화음악’이라 폄하했던 사건은 무색해진지 오래고 그의 음악은 이제 ‘고급스러운’ 영화 음악의 상징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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