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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린조의 『아름다운 여자』를 읽고

성서와문화 2010.01.19 18:34 조회 수 : 1455

 
[ 작성자 : 김 승 철 - 일본 긴죠학원대학 교수 / 신학 ]


1.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1911~1973)의 『아름다운 여자』는, 작가가 45세가 되던 1955년 (시이나가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것은 1951년의 일이었다) 『중앙공론(中央公論)』에 연재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시이나의 작품군 중에서도 「가장 많은 독자를 획득한 작품」으로서 평가되고 있으며, 나아가 「일본에 있어서 기독교 문학의 탄생=<부활의 리얼리즘>의 실현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문학>으로서 재평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절찬될 정도로, 시이나의 문학 세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시이나는 1929년부터 1931년에 걸쳐서 우지가와 전철(현재의 산요오 전철의 전신)에 취직한 적이 있는데, 그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던 개인적인 경험이 『아름다운 여자』의 배경이 되고 있다.
「칸사이의 한 민간철도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름도 없는 노동자」로 그려지는 주인공 키무라 스에오(木村末男)는 다름 아닌 시이나 자신일 것이다.


이 소설의 근본 테마란 무엇일까? 그것은 언제나 미소짓고 있는 신비한 「아름다운 여자」의 이미지가 주인공의 내면에 머물고 있어서, 그 「아름다운 여자」에 의해서 주인공의 일상생활의 건전함이 유지된다라는 것이다.
「나의 마음에 통절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처럼 이상한 나 자신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아름다운 여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나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눈부신 빛과 힘이 가득 채워지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여자는, 마치 눈부신 빛과 힘 그 자체와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눈부신 빛만으로 되어 있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나의 아름다운 여자」는, 숨이 막힐듯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숨돌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 생의 의미의 공간을 주인공에게 부여해준다.
압도적인 힘으로 보통의 인간을 짓누르려고 하는 「시대의 광기」 속에서도, 또 인간관계에 대해 좌절하거나 오해받거나 할 때에도, 「아름다운 여자」는 그러한 어려운 현실에 지지 않고 그 현실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기묘한 에너지이다.
「그 묘하고도 이상한 그림자를 날려버리고, 나의 마음에 열과 충실함을 가져다주는 눈부신 빛인 아름다운 여자」는 「나에게 삶에 대한 충분한 의미를 주며, 게다가 그 충분함을 충분히 살려 준다」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러므로「아름다운 여자」는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모든 공상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현실적」인 일상을 지켜주는 수호자이다.
「이러한 시시한 생활을 충분히 살아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은 익명적 일상성이야말로 현실 그 자체이며, 그러한 일상을 살아 있는 인간 이외에 무엇인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상적 인간이란「사회나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지도 못하고 사라져 가는 인간」이지만, 우리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구하는 것」은 「비굴함이나 겁쟁이, 노예근성 같은 우스운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 옷 밑에서 몰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실체」에 다름 아니다.
요건데「아름다운 여자」는 현실적인 「인간의 이상함을, 힘이 있고 빛나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전환의 계기이다. 「진정한 아름다운 여자」가 떠오를 때, 「나는 사회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회복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한 느낌이 들어서 가엾게도 눈물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아름다운 여자』가 「일상성에의 회귀」라고 하는 모티프를 드러낸다고 하는 지적은, 일단은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자』를 「일상성에의 회귀」라고 하는 모티프만으로 독해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여자」에 의해서 현실을 뚫고 나아간다는 것은, 주인공이 현실 속에서 교제하는 여성들이 「내가 요구하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닌 것」을 역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아름다운 여자」가 단순한 비현실적 환상은 아니라고 해도, 주인공이 교제하는 현실의 여성과 「아름다운 여자」의 사이의 이중성 및 긴장감은 감지된다.
「오후의 빛이 양동이에 담긴 물에 반사되면, 그녀의 작게 오그라든 창백한 얼굴은 반짝반짝 하는 물결과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히 키미는 아름다운 여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슬프게도 내가 찾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운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여자」의 미소는, 「인생에 대해 구속되지 않는 곳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모든 현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도록」해준다. 그것은 벌써 단순한 일상성을 넘어서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그렇다면, 과연 이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것이다. 보통「아름다운 여자」라고 하면, 「어머니적인 것」의 현실적 근원으로서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아름다운 여자』에는 주인공이 다음과 같이 술회하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나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일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절망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무연한 존재였다. 나는 어머니가 우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에게 … 한없는 향수를 느낀다. …지금도 무언가 힘들거나 불안해서 잠들 수 없을 때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한심하고도 부끄럽게도 <어머니>인 것이다」.
그러나 시이나의 「어머니의 상」이라고 하는 단편에 그려진 어머니의 이미지는 극히 부정적이다. 시이나 자신이라고 판단되는 주인공의 소년 쥰지가 「이제 어머니와 나는 결정적으로 별세계의 인간」이며, 「그러한 어머니에게 혐오감마저 느끼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바 대로, 시이나에게 어머니의 이미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단편에 의거해서 생각해 보는 한, 시이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보다 깊은, 보다 엄한, 굴절된 애정이라고 하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코바야시의 보고에 의하면, 시이나의 다른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이미지의 유래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군상(群像)』에 발표된『해후(邂逅)』(1952년)에는, 주인공인 야스시(安志)가 한 순간 본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은 계단으로부터 굴러 떨어져서 격렬한 아픔을 참으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보는데, 그 때 주인공은, 「유머와 같은 신의 미소를 느꼈다」라고, 시이나는 쓰고 있다. 「야스시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의식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방인의 남자가, 그의 조금 남은 의식 안에 나타났다. 몸에 감은 하얀 옷이 눈부셨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요, 라고 그는 그 남자를 향해서 웃었다.」
주인공의 의식이 몽롱해지는 가운데에 나타나 그를 위로하듯이 미소 짓는 「이방인의 남자」,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의 모습일 것이다. 예수는 「이방인의 남자」의 모습을 한 체 주인공의 앞에 나타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이방인의 남자」의 미소를 본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 남자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괜찮아요.」라고 중얼거린다.
「괜찮아요」라는 대답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며, 당신으로부터 크게 격려 받았다고 하는 감사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쓰려진 사람 앞에 나타나 미소 지으면서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이방인의 남자」는, 시이나가 성서 속에서 찾아낸 예수의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예수가 『아름다운 여자』에서는 보다 일상적인 모습으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코바야시가 말하듯이, 그 직접성이 부정된 「이방인의 남자」는 평범인의 원형, 일본적인 일상에로의 회귀라는 식으로 평가되는 『아름다운 여자』에 와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다만 눈부실 뿐인 빛과 힘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여자>로서 문학적, 그리스도교적인 생명을 얻어서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름다운 여자」는 아름다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초월자의 암호」(K·야스퍼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낯선 사람, 이름 없는 사람으로서 다가오는 그리스도」(A·슈바이처)를 「아름다운 여자」로서 변용시켜서 그 딱딱한 종교성을 부드러움으로 바꾸는 일, 또한 일상적인 「아름다운 여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 이 두 가지의 왕환(往還) 운동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에, 시이나의 기독교 문학이 있고, 나아가 기독교 문학 자체의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독교 문학의 기독교성과 문학성은 이러한 왕환운동의 다이나미즘을 견지하는 곳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러한 다이나미즘은, 「진정한 신이며 동시에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있어서 그 근거를 가진다.
또한 그 다이나미즘은 「<아름다운 여자>의 환상에 의한 계시가 엄격주의(리고리즘)를 배제하는 관용의 태도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이나의 『아름다운 여자』는 단순한 일본(기독교)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서 「<세계 문학>으로서 재평가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평가는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원고는 지난 여름 일본 교토에 있는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가진 동북아시아 기독교 문학회의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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