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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의 아침 - 시를 쓰는 마음 (4)

성서와문화 2010.01.19 18:31 조회 수 : 1447

 
[ 작성자 : 임 인 진 - 시인 ]


산과 산 사이
두엇 뼘만큼 하늘이 열린 마을에
게으른 아침 해가
소올 솔 안개를 잦힌다.


눈 뾰족 치켜뜬 씨감자
움에서 막 나와
앞마당에 지천으로 널렸는데


보습쟁기 등에 진, 허리 굽은 농부
어이새끼 소 앞세워
어디여! 이리, 저리, 쯧 쯧
가릉 가릉 숨찬 비탈길 오른다.


소리 들은둥 만둥
지싯대는 송아지 바라보던 어미 소
심드렁한 발걸음 더디다.


산문(山門) 밖 밝은 세상이
어른어른 마음에 얼비칠 때
산비탈 돌삭밭 쟁기질로 굳게 다져온
한 생의 끝자락 뉘일 곳 따로 있으랴


문전옥토(門前沃土) 부럽지 않은
산을 높이 떠받들고
곤드래, 딱주기, 곰취, 참나물 뜯는


어수룩한 골짜기
장전막동(長田幕洞) 두엇 뼘 하늘에
하느작하느작
아침 해 떠오른다.


- 졸시 「산촌의 아침」 -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이 자주 꿈속에 나타나곤 합니다. 태백의 큰 산줄기 갈피에 끼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곳을 떠나 반세기를 넘기도록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끔 목이 메도록 가슴저려드는 그리움의 정체를 되도록이면 눌러 잠재우려고 애써보았습니다. 어설픈 인식과 어눌한 언어가 그네들 삶의 본질과 진실을 그릇 호도(糊塗)할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고, 어쩔 수없이 따르는 비애 의식 삭히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체험을 현재의 재인식으로 가다듬어 미래를 향해 밝게 형상화하는 일이 시를 낳기 위한 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밝은 앞날을 위해 생각을 틔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의 정점(頂點)이겠지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이 정상을 향해 땀을 흘린다고나 할까요? 시의 정점이 산 정상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탁 트인 하늘과 넓은 시야, 벅찬 감격이 솟아야겠지요.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운 나의 시의 정점에는 언제나 먹구름 같은 우울과 비애가 서려 안타깝습니다. 향토성 짙은 토속미를 현실적 정서로 그려놓고 보면 들뜨고 얼버무려 그린 풍경화에 지나지 않아 더욱 화가 치밉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국유림을 관리하기 위해 닦은 임도(林道)를 따라 해발 1000여 미터의 산기슭을 랜드로바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말로만 듣던 하늘아래 막바지 산골마을에서 늦은 아침을 맞았습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그 골짜기의 안개 자욱한 하늘을 손바닥으로 재어보니 겨우 두서넛 뼘 될까 말까였습니다.
씨감자 눈 따줄 일손조차 보이지 않는 적막감 도는 마을에서 늙은 농부가 보습이랑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송아지 딸린 어미소를 몰아 힘겹게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느긋함이 몸에 밴 그의 몸놀림에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노인의 체념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렸습니다.
돌사닥다리 밭을 갈아 돌을 들춰내고 옥수수와 감자를 심어 가꾸는 일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고지식함이 바로 순수(純粹)와 소박(素朴)의 밑바탕일 것입니다.
산골 사람이 바닷가 사람보다 어질다고 합니다. 사계절을 통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자연과 사물에 순응하며 살아온 성정(性情)의 기질을 일컫는 것이겠지요.
순하다는 소도 더러는 심술을 부릴 겁니다. 허구한 날 힘든 일만 시키니까요. 어깆거리는 소로 밭을 갈다가 지쳐 산그늘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절로 한숨이 나오겠지요. 한숨을 안으로 삭히다보면 체념으로 길들여지고 체념이 쌓이면 한(恨)이 된다더군요.
「장전막동 올감자 정든 임 다 캐주고
두벌 두지 세벌 두지 아리기도 아리다.」
그들은 절절한 고달픔의 한을 낙천적인 사설(辭說)로 풀어「아라리가락」 구성진 곡조에 실어 달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산에서 해가 뜨고 산으로 해가 지는 그 골짜기 사람들은 산의 음덕(陰德)으로 살아가는가봅니다. 산이 내어주는 먹을거리로 허기를 면하고, 온 산에 널려 핀 꽃들과 새들의 노래로 기쁨을 삼고 위안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산 너머 산, 산에 갇혀 있어도 산의 고마움을 알고 두엇 뼘 하늘 바라보며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 점 부끄럼도 없을 것 같기에, 안개 걷힌 하늘에 떠오른 해를 바라보듯 글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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