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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가장 창조적인 경험”

성서와문화 2010.01.19 18:30 조회 수 : 1310

 
[ 작성자 : 이 상 범 - 신학 ]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 우리가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붙여 부르는 ‘마하트마’란 ‘위대한 영혼’이란 뜻의 존칭이다.


간디가 처음 남아프리카에 갔을 때의 일. 청년 간디가 프레트리아 행 기차의 일등칸에 탔다. 그러나 마릿츠버그 역에서 한 역원이 올라오더니 화물칸으로 옮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백인 손님 한 사람이 유색인종과 동승할 수 없다며 역원을 불러 온 것이었다. 간디는 일등차표를 내보이며 권리를 주장하고 항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경이 와서 간디와 그의 짐을 기차 밖으로 내팽개쳐버리는 것이었다. 화물차에 탈 수 없다고 버티던 간디는 끝내 시골 역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신세가 된다. 남아프리카라고는 하지만, 인도출신의 간디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겨울밤이었을 터. 그러나 청년 간디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추위보다는 노여움이었을 것이다.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나, 이대로 인도로 돌아가고 말아야 하나. 아니면, 모욕을 견디면서라도 프레트리아에 가서 일을 마치고 인도로 돌아갈 것인가.” 밤새도록 궁리했다.
이튼 날 아침, 간디는 철도회사의 책임자에게 장문의 전보를 쳤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했다.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굴욕적인 경험은 뒤를 이었다. 역마차를 타자, 마차 안이 아니라 마차꾼 곁에 앉으라 했다. 항의하는 간디의 뺨을 후려갈긴 백인 차장이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간디는 일어난 일을 적어 역마차 회사의 책임자에게 보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 차별을 속속들이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남아프리카에서 간디가 경험했던 인종차별과 그로 인해 간디가 입은 상처에 대해서가 아니다. 간디의 이름 앞에 ‘마하트마’를 붙여서 부르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끄는 바는, 훗날 간디 자신이 “일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라 일컬을 수 있었던 그 경험에 대해서이다.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란 말로 표현하고자 한 마하트마의 경험이란 것이,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생생한 인종차별의 실상을 새삼 강조하려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창조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경험이라고 한다면, 한 인간의 내면이 지금까지 느끼거나 깨닫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무엇을 환기시켜주는 경험이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심리학자들의 분석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심리상태도 아니다.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그의 창조적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의 머리는 노여움으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노여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아주 다를 수 있을 것이고, 그 처리 방법에 따라, 들어나는 ‘인간’ 또한 천차만별이 된다.
우리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의 그 일 이전에도 여러 차례 노여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의 그 경험을 “일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노여움을 컨트롤 하는 방법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그가 노여움을 컨트롤 한다는 것은 일어난 분노를 그냥 갈아 앉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분노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명하는 길을 찾는 일이었다. 그가 철도회사 책임자에게 전보를 친 것도 그 방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일생을 두고, 간디가 즐겨 읽었다는 인도의 경전 “하바갓트 기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고 했다. “노여움에서 미망(迷妄)이 생기고, 미망에서 판단력의 혼란이 온다. 판단력의 혼란에 의해 이성이 상실되고, 이성의 상실은 인간을 멸망케 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본다면, 인생이란 뜻밖의 경험에서 촉발된 감격이나 분노를 처리해가는 시련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노여움은 한 인간을 성숙케 하는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숙하지 못한 판단에 의해서 실패를 맛보는 범속한 사람에게도 구제 받아야 할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제할 수 있는 기회도 위대한 사람의 성숙성의 도움에 의해서 온다.


교수나 목사직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나’라는 말은 전문적 식견 말고도, 노여움을 창조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탈레반과 종교
장 기 홍 ·지질학
한국인 23명의 남녀 청년 기독교인들이 봉사 겸 전도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탈레반 게릴라들에게 납치되어 고산(高山) 사막으로 끌려 다닌 지 보름이 되어간다. 봉사단의 인솔자인 부(副)목사가 살해되었고 수일 후 또 남자 한분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억류된 자기네 지도자와 동료들을 인질과 교환하자는 것인데 이는 아프간 정부와 미군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조건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서 한때 정권을 잡아 아프간을 지배했지만 미국의 무력간섭으로 패배하여 게릴라가 되었으므로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류유산(人類遺産)이기도 한 그 거대(巨大)불상(佛像)을 타종교의 우상이라 하여 폭파시킨 장본인들로 유명하다. 엉뚱하게도 무고한 한국인들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나 속수무책이다. 미국과 아프간은 한국과 탈레반을 이간시키기 위해서라도 계속 버틸 것이다. 한국이 인질구출작전에 나서도록 유도할 것이다. 실로 난처한 입장이다.


투쟁방식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반(反)종교적인 범죄이다. 자기네 나라에 의료 등 갖가지로 봉사를 하러 온 사람들을 그렇게 유린하면 그것은 세상에서 점점 더 선의(善意)를 좌절 위축시키는 일이다. 종교를 앞세우는 자들이 납치 살해를 일삼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네 종교에 먹칠을 하고 있음이다. 체온을 훨씬 넘는 사막에서 그들은 며칠을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 목사는 어린 남녀를 잘못 인솔해간 것을 후회하고 열대사막의 폭염 아래서 좌절과 실의에 빠져 병이 났을 수도 있겠으나 부검결과 총탄으로 숨진 것이 확실해졌다.


세상에 많은 게릴라전이 있어왔지만 인명을 납치하여 무고한 인질의 생명을 해치는 일은 이슬람교도들의 짓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종교가 소용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현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 측 대표인 목사를 골라 죽인 것은 저절로 그것이 종교싸움임을 나타낸다. 소지품에서 기독교 선교책자가 나왔다 해서 이제부터는 여자도 종교적 적으로 간주하여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그들의 순교를 일컬을 것이나, 개종을 위한 선교나 순교나 종교 싸움이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날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봉사단이 아프간행에 앞서 촬영한 기념사진에 보이는 그들은 너무나 밝고 환하게 웃고 있다. 봉사정신이 투철한 극히 선량한 청년들이다. 다만 지도자들에게는 책임이 무겁다. 아프간 현 정황의 내력과 정세(情勢)를 알고 좀 더 전전긍긍했더라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인데, 너무 낙관했던 것 같다. 여기서도 한국인 특유의 근시안이 문제가 된다. 교인들이 연보를 덜 내어 해외 봉사 전도에 비용이 부족했더라면 불행이 없을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다 가족과 온 나라에 그렇게 많은 폐를 끼치는가!
종교는 ‘필요의 산물’이었다. 인도는 힌두교의 보수성(保守性) 덕분에 무수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으로 유지되어 왔다. 계급제도와 그 미신적 숙명론이 합하여 그것을 믿고 따르는 인도민족을 결속(結束) 유지시켰다. 이스라엘 민족도 ‘아브라함의 종교’의 소산(所産)이다. 유대교 없이는 유대민족을 생각할 수 없고 힌두교 없이는 인도민족을 생각할 수 없다. 종교는 민족이라는 자아(自我)의 장치다.


필자는 자아(自我)-비아(非我)의 구도가 생물계 특히 인간계의 근본구조(構造)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자아의 장치의 하나가 종교이다. 종교는 자아(自我)를 억세게 하는 잠금장치 같은 것이다. 과거의 지리적 격리와 불편이 자아(自我)-비아(非我) 관계를 북돋우었다. 그래서 상이한 각 종교들이 있게 된 것인데 지금은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그런 잠금장치였던 종교는 거북한 거추장이 되었고 청산 대상이 되었다. 하나의 세계를 위해서는 보편적 지도이념이 필요하다. 다양한 종교들을 아우르는 어떤 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탈(脫)종교’의 단계가 불가피하다. 종교의 좋은 점은 그대로 가지면서 나쁜 점을 청산하는 탈종교이다. 자아(自我)-비아(非我) 관계는 어떤 모양으로나 늘 있을 것이고, 이 세상은 언제나 투쟁이 있어서, 그래서 힘을 내게 마련이다. 바라기는 ‘선(善)한 싸움’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랑과 선의(善意)가 우세한 자아(自我)-비아(非我)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목표에 방해가 되는 종교들이라면 물러나야 한다. 더러운 싸움을 더 부추기는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 지금의 종교들은 더러운 싸움을 장려하는 장치나 도구 같이 되어 있다. 이 상태는 지양되고 청산되어야 한다.


세계평화의 열쇠가 종교에 있다. 망가진 열쇠는 버리고 새 열쇠를 마련해야 한다. 새 열쇠는 망가진 열쇠를 버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슬람교도들은 자기 종교에 집착 말고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에 집착을 말아야 한다. 가서 전도를 하여 개종을 시키자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제 세계가 하나가 되어, 처음 종교를 형성했던 원인상황 곧 지리적 역사적 원인상황이 제거되었다. 종교는 다른 것과 달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탈레반의 이슬람교도들에게만 종교를 버리라 할 수 없으므로 모두가 함께 버려야 한다. 세계평화의 발목을 잡는 종교적 독소를 해독(解毒)하자는 것이다. 현재대로의 종교들을 가지고는 세계평화는 입발림에 불과하다. 비(非)종교화라는 해독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위해 지금의 산고(産苦)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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