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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있는 길

성서와문화 2010.01.19 18:30 조회 수 : 1414

 
[ 작성자 : 허 만 하 - 시인 ]

 
18년 만에 강진(康津)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고향 마제로 돌아와서 맞이하는 첫 여름, 멀리 북한강 기슭까지 찾아 온 옛 제자에게 묻는 말 가운데서 인상적인 것은 백련사 가는 길 동백이 어떠냐는 꽃의 안부를 묻는 대목이다. 그는 남국의 초당에서 거처하며 거닐었던 길가 동백의 선홍색 꽃빛깔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나들이에서 만났던 길가 꽃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내가 지났던 무명의 길을 생각나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다. 그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그 꽃그늘에 서는 것이다. 이 지음 길에서는 초록색을 배경으로 한 배롱나무(백일홍) 꽃의 아름다움을 심신찮게나 보게 된다.
배롱나무 꽃은 선홍색으로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보라색이 섞여있는 간색 꽃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흰 꽃을 들어내기도 하는 변화를 보인다. 배롱나무는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는 일의 잘못을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잊을 수 없는 꽃나무로 부용(芙蓉)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것은 전라도 길에서였다. 대전 통영 고속도로에서 장수 IC를 내려선 국도에서 나를 기다리던 몇 그루 꽃나무는 마이산 가는 길을 따라 간헐적으로 몰려 서있거나 흩어지거나 하면서 연분홍 꽃을 조용히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어이 차를 세우고 길에 내려서서 커다란 꽃을 어루만지게 하던 이 꽃과의 첫 만남을 나는 잊지 못한다.
부용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줄기 상부 커다란 잎새 겨드랑에 제법 긴 꽃자루를 가진 연한 홍색 꽃을 펼친다. 아침에 피어난 꽃은 저녁 무렵이 되면 그 선홍색은 농도를 더하여 서쪽하늘 노을빛이 된다. 옛날 촉나라 왕은 이 빛깔을 사랑하여 거성이 있던 성도(成都)길을 온통 이 부용으로 메워 그 길이가 4백리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난 8월 10일 오랜만에 통영을 찾아보게 되었다. 지루하던 비도 개이고 모처럼 맑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날씨였다. 시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할 때 알게 된 김종길(金宗吉 1926-현) 시인께서 청마 문학상을 수상하는 식전이 그 곳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 1회 수상자로 김춘수 시인을 뽑은 심사 위원장을 지낸 그의 수상으로 청마 문학상의 위상이 한결 높아진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내가 제5회 수상자가 될 때의 심사위원장도 김종길 시인이었다. 그의 청마문학상 수상은 시간을 초월한 일이었다.
모처럼 사모님도 동행을 하신다는 기별을 주최측에서 듣고 우리 내외도 통영으로 달려갔다. 택시가 창원을 지나, 마산 들머리에 접어들 무렵 나는 뜻밖에 부용화를 보게 되었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이룩된 항일애국 지사 허당 명도석(虛堂 明道奭) 기념비가 부용화에 묻혀 길가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근로청년을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하고 밀양 폭탄사건을 계획하고 상해에 있던 여운형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던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산 시민들이 세운 비는 칸나와 부용 꽃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비의 주인은 시인 김춘수의 장인이었다.


김춘수는 한국시의 역사에서 이정표의 하나가 된다. 그의 업적을 나는 〈근대 주관주의적 미학〉에 머물고 있던 한국시에 〈존재론적 미학〉을 자각적으로 도입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꽃」이 그런 범례가 된다.
마산의 끝머리 밤밭재를 지날 무렵 하이데거의 숙제가 떠올랐었다. 여태까지의 예술은 아름다운 것 미(美)와 관계하고, 참(眞 Warheit)과 관계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하이데거의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참(진리, 진실)은 물론 과학이 찾아내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참이란 나(세계내 존재로서의)와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이란 존재자의 참의 작품화 Werk 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n이다.
이 밤밭재와 마산 서쪽 끝머리 가포리 바닷가 사이에 내가 만 3개월의 젊은 시절을 보냈던 마산의 육군 군의학교가 있었다. 군의관 임관 전에는 그렇게 지겨웠던 훈련장이 반세기의 세월 저쪽에서 멀리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밤밭재가 끝날 무렵 나는 지금은 폐로가 된 고갯길을 들러 고성을 향했다. 옛 이름은 동전고개’였다. 시인 백석(白石1912-196?)이 남긴 작품 「고성가도(固城街道)」도 지금의 국도가 아니고 동전고개를 넘는 옛길이었을 것이다. 옛날 고성 길은 동전(東田) 마을을 떼어둔 채 연두색 안개가 서려 있는 한적한 진초록 숲길이 되어 있었다. 백석이 통영을 찾노라 (그에게는 統營이란 시가 2편 있다) 지났던 고성 길에서 보았던 꽃은 진달래 개나리였던 사실을 그의 시「固城街道」는 말하고 있다. 평안북도 태생의 백석에게 남국의 봄은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통영에서 돌아오는 길에 연화산 도립공원 자락을 감아 도는 국도를 찾아 일부러 우회해 보았다. 이 우회 길에서 길고도 아름답게 뻗쳐 있는 길가 배롱나무 행렬 틈새에 감나무가 끼어 있고, 이따금 탐스런 열매를 달고 있는 밤나무가 이 나무들을 뒤에서 받치고 있는 시골길을 만나게 되었다. 따가운 햇살을 안으로 받아드리며 시퍼런 감은 남몰래 홍색을 더하고, 밤송이 가시는 터질 날을 기다리며 익어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길가에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성숙의 길을 말없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배치고개를 넘을 무렵에는 창밖으로 팔을 내밀면 이쪽으로 가지를 뻗치는 가지를 잡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만나 볼만한 이름 없는 길이 우리 둘레에 살아남아 있는 일이 무척 반가웠다. 그 반가움은 길가에 꽃나무를 심고 가꾸는 마음씨를 만나는 반가움에 겹치는 이중의 반가움이었다. 우리는 가을에 아무 볼일 없이 이 길을 만나보는 즐거움만으로 이 길 위에 설 것을 다짐했다. 그 때까지 배롱나무는 숨은 자리에서 정성껏 자기의 선홍색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즐겼다는〈설하갱(雪霞羹)〉이란 두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부용화를 꺾어 꽃받침을 떼어낸 홍색 꽃잎을 두부를 만들 때의 휜 콩죽에 넣어 함께 저어 두부를 만들면 홍색과 흰색이 서로 어울려 눈이 개인 뒤의 서쪽하늘 노을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두부가 태어난다
한다.
동양인이 논리적인 체계로 정립하지 못하고(않고) 있는 정신적 가치로 ‘멋이 있다. 두부는 아니더라도 내리던 눈이 멎고 개이기 시작하는 서쪽 하늘에 피어나는 노을을 부용화 꽃잎 빛깔에서 느끼는 마음씨는 시를 느끼는 마음씨와 같다.
시가 있는 통영 시민문화회관에서 만나 뵌 시인 김종길 시인 내외분은 정정하였다. 나의 고향 대구에서 50년 전에 처음으로 만나 뵐 때의 아름다움을 정신의 심지로 숨기고 있는 것을 곁에서 그 날 통영에서 느낄 수 있었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시민회관에서 멀지 않는 동호동 61번지에서 태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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