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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같은 제의(祭儀)를 꿈꾸며

성서와문화 2010.01.19 18:27 조회 수 : 1338

 
[ 작성자 : 김 수 우 - 시인 ]


흠집 많고 귀 빠진 소반에 얇은 공책과 연필 한 자루가 놓여 있다. 마침 쪽창으로 기어든 빛이 한 접시 햇살로 곁들여진다. 첫울음 터뜨리자마자 머리맡에 놓인 꽃잎 같은 풍경. 바로 나의 제왕판이다. 미역국조차 제대로 먹기 어렵던 빈한한 부부의 단촐한 제사가 바로 나의 기원이었던 것. 그 소박한 축복이 내 문학의 젖줄이었던 것.
중학교 입학 후 첫 여름. 수업시간에 번호순으로 방학계획을 발표해야 했다. 대체적으로 영어를 열심히 하겠다는 아이들의 다짐을 듣는 내내, 유난히 내성적이던 난 가슴 쿵쾅거리며 쩔쩔매었다. 차례가 왔을 때 속으로 되뇌이던 말을 겨우 뱉었다. “바닷가에서 예쁜 돌을 줍겠습니다.” 순간, 한심한 듯 영어선생님이던 담임의 퉁명한 뒷소리가 따라왔다. “나 참, 그깟 돌을 주워 뭘 하겠다고….” 그 부끄러움과 아득함. 삼십여 년이 지난 몇 해 전까지도 그때 왜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내 자신이 종종 막막하곤 했다.
얼마 전 내 제왕판 얘기를 듣고서야, 그 트라우마는 제비꽃처럼 피어 일상의 모퉁이를 보라빛으로 밝혔다. 유년 시절 구하기 어려워 훔쳐서 보던 책들도, 청소년 시절 전국 백일장을 떠돌아다니던 발길도 다 그래서였던가. 별다른 재주도 없으면서 읽고 쓰는 일이 전부인 지금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었던가. 공책과 연필이 놓인 가난한 제왕판 위에서 내 실존이 해명되는 순간이었다. 하나의 민간 속설일 뿐인 그 빛바랜 제의(祭儀)가 삶의 연기(緣起)를 끌어내는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만이 제의를 꿈꾼다. 문명의 진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제사가 있었는가. 단군도 제사장이었듯, 우리 상고시대에도 제천의식이 풍요로웠다. 상상력에서 비롯된 제의는 인간을 인간답게, 또 아름답게 하는 요소가 아니었을까. 모든 예술이 원시 제의의 형식이었듯, 올림푸스 신들에게 올리던 제사도 모두 시와 연극, 음악이었다. 현상을 극복하고 몸속의 우주를 끌어내고 존재의 끈을 연결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그만큼 절실하고 강렬했던 것이리라. 생명은 매순간 뜨겁고, 감동을 원천으로 하는 기쁨과 슬픔 자체인 것을.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로써 서로 관계하고 배려하며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선험적 능력을 언급했다. 관련을 맺을 수 있는 우선적 능력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의(祭儀)란 억 년 지층에서 관계를 광석처럼 캐어내며, 그 깊이를 다이아몬드로 가공해내는 섬세한 눈빛이며 손길이다. 원인과 조건을 끌어내는, 그리하여 연기(緣起)하는 시간과 공간을 찬란한 그물로 엮어내는 것이다. 생명에 정성을 깃들이는 이 행위는 동시에 우리, 또 각자에게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발견하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제사는 의례가 아니라 엎드림이다. 삶을 향한 감사와 한계에 대한 겸손, 바로 하심(下心), 마음을 내리는 의식이다. 문화적인 차이는 다양한 제의의 형식을 낳았지만 결국 하심에서 비롯되는 것. 초새벽 정화수를 긷는 발길이 그렇고, 아기를 위해 제왕판을 준비하던 손길이 그렇고, 중세기 수도사들의 고행적인 기도와 티베트 승려들의 오체투지가 그렇다. 구약에도 전적인 헌신을 비유하는 번제를 비롯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아름다운 제사들이 있거니와, 신약에는 진정한 희생제인 과부의 두 렙돈이 있다. 온전한 마음인 두 렙돈이 이 시대 우리가 배워야할 참된 제의가 아닐까. 어떤 교리도 복잡함도 없는, 희생적인 순수함은 이 지상에 푸른 길을 무수히 풀어놓은 성스러운 작업 자체이리라.
척박한 사막에서도 메카를 향해 엎드리던 낙타지기의 갈라진 뒤꿈치, 봉쇄수도원의 벽을 울리는 찬양, 히말라야를 오가는 머나먼 순례, 사원을 돌며 힌두의 신들에게 꽃을 바치는 손길 속에서 나는 종교의 형식을 보는 게 아니라, 꽃잎 같은, 따뜻한 제의를 본다. 겸허한 손과 무릎을 본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터득한 존재였던가. 그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게 무엇이던가. 제의를 꿈꾼다는 건 내면의 신성을 만난다는 기적. 이 신성은 의식을 다스릴 뿐 아니라 무의식까지 닿은 힘으로 우리를 치유한다. 이 치유는 모든 종교를 회통( 回通)하는 힘이 아닌가.


제의는 삶을 경외하는 힘에서 나온다. 원시의 경외와 경이가 오늘날 회복해야 할 제사들이다. 한계적 존재임을 깨달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몸을 낮추는 일, 하심을 통해 아상(我相)을 죽이는 것이다. 손의 가장 아름다운 자세는 바로 기도이며, 무릎이 가장 아름다운 때도 엎드리는 순간이 아닐까. 깨어있는 손과 무릎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초래한 경악과 경박, 그 교만을 깨달아야 하리라. 욕망이 자꾸 커지고 삶은 자꾸 허망해지는 소비 중심의 사회에서 신성(神性)은 폐허가 되고, 모든 제의는 자본주의의 기능으로 전락하고 있다. 제의의 기복적인 요소를 염려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기복의 방향이리라. 자기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기복이라면, 이 별은 얼마나 더 환해질 수 있는가.
이런 인사를 들은 적이 있다. ‘책임지고, 행복하세요.’ 단순히 던져진 말이지만 그건 한 줄기 햇살이었다. 행복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 책임진다는 것은 삶에 정성을 드리는 일, 곧 제의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정성은 곧 구성원에 대한 배려이며, 동시에 관계를 향한 애정으로 행복의 큰 조건이 된다. 그렇게 나에게, 타자에게 서로 아름다운 주술을 걸면서 산다면 생(生)은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일까.
예수는 우리 스스로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신 분이다. 과부의 두 렙돈 같은, 깊고 정갈한 정성을 다시 심을 수 있을까. 일상의 모서리마다 삶을 공양하는 작은 제의가 꽃필 수 있을까. 머리맡에 햇빛 담은 제왕판을 하나 놓고 싶은 봄, 마음놓고 돌멩이를, 돌멩이 속의 우주를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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