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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力, 그 영적인 응시

성서와문화 2010.01.19 18:12 조회 수 : 1293

 
[ 작성자 : 김 수 우 - 시인 ]

 
자갈치시장이 끝나는 모퉁이, 사탕수레가 있었다. 수십 가지 사탕 위로 퍼진 오후햇살에 주변이 한 편 동화처럼 반짝였다. 평생 새벽바다를 끌어올린 억척 자갈치아지매였을 법한 칠순노인이 꾸리는 행상이었다. 비린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풍경은 무수한 겹으로 둘린 듯 풀럭였다. 건널목이 있는 그 곳을 지나치면 늘 마음이 아득해지곤 했다. 무한한 함의로 다가오는 정경.
사람도 사물도 수십억 년의 지질층과 같은 게 아닐까. 무수한 시간과 공간의 겹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각기 다른 빛깔, 다른 향기로 존재하는 겹겹 그 무한한 층들. 우리 눈 속엔 어느 층까지 담기는 걸까. 물질만능 속에서 인간의 직관력은 어디까지 그 세계를 읽어낼 수 있을까.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집단 대이동을 하는 군주나비 떼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4,5세대를 되물림하며 건너가는 4,000km 먼 하늘. 허공을 수놓은 찬란한 날개들. 쌀쌀함을 감지한 순간 모든 행위를 멈추고 시작된 비행. 그 장면은 일상에 푸득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가득했다. 강렬함과 장렬함. 허나 그 또한 우주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 그 거대한 숲의 풀잎 한 장 같은 것이리라. 저 머나먼 천왕성에선 지금도 큰 폭풍이 일고, 구름이 피었다 지고 있으리니.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그 먼데뿐이랴. 가까이 있어도 까마득한 세계가 많다. 낡고, 부서지고, 버려진 것들. 그 남루함과 퇴락은 우리에게 멀고 어둡다. 우리 눈길이 늘 새 것만, 편리한 것만 향하기 때문이다. 새롭다는 건 무얼까. 이 지상에 정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예술과 문화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사람들을 새 것에 집착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것 콤플렉스’라고 할 만큼 ‘새 것’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극단의 소비문화와 정체성 상실로 우리 영혼은 늘 난감하다.
길을 가다 버려진, 발목 부러진 의자 앞에서 발을 멈춘다. 누추하고 망가진, 올데갈데 없는 모습. 그러나 의자가 발휘하는 존재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아찔하기까지 하다. 사물의 눈빛에 부딪히는 순간 어떤 울림이 마음을 흔든다. 내 내면의 음성일 수도 있지만, 분명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어떤 생명 에너지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깊이, 그 낡음, 함부로 푸득이지 않는 침묵에서 내 존재감을 회복할 때가 많다. 제자리를 찾아 낡고 있는 사물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엿본다. 삶과의 소통이 유난히 선명해지는 순간.
조금만 주시해보면 막연한 유대감이 아닌 퇴색한 것들의 무수한 의미 층이 쿨럭쿨럭 일어난다. 동시에 차츰 가장 정직한 내 모습, 그리고 인간의 바닥없는 슬픔과 마주치게 된다. 빛바랜 그 자리에 쉰내 나는 아버지의 한숨과 헝클어진 신발들이 흘러가고, 그 사이로 매일 널리는 빨래들이 펄럭인다. 물결무늬 뚜렷한 담벼락에 꿈틀거리는 일상의 육성들. 꼬질꼬질한 동강지우개까지 필사적인 희망을 말하는 듯하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언어며 문법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말을 가진다. 자기만의 정보를 구사하는 중인 것. 그 언어를 읽어내는 건 영혼의 눈빛이다. 그 앞에서야 모든 생명은 화석이 아니라 출렁출렁 살아있는 몸짓을 한다.
진정한 시력은 영혼의 눈동자에서 나온다. 낡음 속에서 오래된 존재를 읽어내는 힘, 그 속에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의지. 동시에 보이지 않게 치유되는 것들. 그 살아있는 침묵이 삶을 환기시키고 회복시킨다. 박장대소보다 설풋한 미소가 더 행복해보이고, 마음을 정화시키듯 말이다. 그 순간이 어찌 새롭지 않겠는가. 오늘의 존재감이 가장 확실한 미래이다. 나이테가 나무를 더 푸르게 세우듯, 영적인 나이테는 낡은 풍경을 늘 새롭게 흔들어준다.
어차피 삶의 뿌리는 무상이며 고통이다. 고통을 응시하는 삶. 거기서 우리는 깊어진다. 어둠과 절망이 고이면서 깊이를 만드는 것이다. 한 마리 심해어(深海魚)처럼 그 깊이에서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거나 더 큰 눈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인간은 모든 우상을 침묵시킬 수 있다고 했다. 까뮈의 말이다. 진정한 삶의 향기를 위해 낡은 창가에 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새로운 깊이를 위해 좀 더 가난하고 배고픈 오후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발적 가난과 자발적 포기만이 이 시대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지혜인지 모른다.
오늘도 퇴색한 벽 앞에서 겸허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조금은 초라한 세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저 고맙고, 자신과 모두에게 미안해진다. 삶의 고통을 자각하게 하면서도 삶의 기쁨을 깨닫게 하는 가난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면서 생은 조금씩 새로워진다. 새로움은 없던 걸 발견하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더 깊이 깨닫는 것일 뿐.
새해가 오고, 새 하루가 열리고, 새 만남이 준비된다. 일상을 새롭게 꾸리는 건 우리의 눈빛이며 사색이다. 문득 몸속에 비행을 향한 어떤 신비의 층이 있는 듯, 한 마리 군주나비처럼 삶을 날아올라야 하리라. 찬란해라.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눈부신 사건들이여. 결국 삶의 진정한 새로움은 영혼의 눈빛에 있다. 삶의 뒷면에 귀기우린 직관력과 철학적 사유가 풍경을 새롭게 한다. 한 영혼, 영혼은 건널목이 보이는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중. 그렇게 마음의 사탕수레를 끌고 갈 수 있다면 삶은 늘 갖가지 보석으로 반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