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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예술:그 의미의 있음과 없음에 관하여 (하)

성서와문화 2010.01.19 18:09 조회 수 : 1538

 
[ 작성자 : 최 종 태 - 조각가 ]


2004년 10월 예술원 국제심포지엄에서, 그 때 발표자 중에 미국의 코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 랜싱·죤스(Lansing-Jones)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제가 「미국미술의 데카당스 시대」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의 현대미술을 예술의 데카당스시대라 규정지은 것입니다. ‘데카당’이라는 말은 ‘쇠퇴’라는 뜻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미국미술이 쇠퇴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 분은 이것이 자기의 논지가 아니고 그가 존경하는 선배 학자의 저술「여명에서 쇠락까지」라는 책에 근거한다는 말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2000년에 발간되었는데 르네상스 이후 서구문화 500년에 걸친 방대한 연구라는 설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데카당스라는 단어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덧붙졌습니다. 그는 미국미술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단정 짖고 있었습니다.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여러 가지 양식들이 마치 토끼가 새끼를 낳듯 번성해왔다. 하지만 각 범주들은 의미심장한 존재로 발전하기 전에 짧게도 그 생명이 끝났다. 미래를 약속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단명하게 사라져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이미 잉태될 때 자기 파멸의 씨앗을 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가 말한 결론을 원문 그대로 여기 옮기고자 합니다. 랜싱교수는 매우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기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러한 방법이 더 온당하고 전달이 더 잘 될 것 같았습니다.
『희망은 인간의 가슴에서 영원히 솟구쳐 나온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내 마음속에 생겨나고 있는 혼돈을 되짚어보며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그 때 내 눈 앞에 웅장한 산봉우리가 보였고 그 아래 녹색의 넓은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계곡 바닥에서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무언가를 개발하는데 열심이었다. 옆에서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들의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각 집단이 자신들만의 편협한 프로젝트에 심취하고 있었고 이웃에게서 무언가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에게 비전이 없고 멀리 보는 눈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시간이 무르익었다. 어떤 때가 온 것이다. 한 집단이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어떤 진실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 진실을 기치로 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 집단이 그 진실 됨을 인정하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기치를 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산을 올랐다. 모두 하나의 이상을 향해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산 정상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 곳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문화의 한 막이 전개되었다』
몇 해 전에 베니스 비엔날레를 본 일이 있습니다. 40명의 미술인들과 함께한 여행길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 뜨거운 여름날 힘들게 전시장들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와서 40명의 미술가들이 아무도 그 소감을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떠냐고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돌아와서도 여러 사람들한테 그 베니스 비엔날레의 작품성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자리에서 평론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점심 먹는 자리에서 또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자기는 첫날 오픈 행사 때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 파는 곳 그 앞마당에 간단한 인쇄물이 놓여 있어서 주워보니 앞줄에, “전시장에 들어가시는 여러분,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자 하는 관심과 기대를 여기에서 버리십시오.” 하는 말이 적혀 있더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평론가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 하는 말이 역사란 것은 시계추와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갔다 계속 반복한다는 것이고 지금 그 시계추가 왼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추가 갈 데까지 다 가야만 반동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강조하는 뜻은 가는 시계추를 막을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갈 데까지 다 가서야 돌아온다 그런 말이었습니다. 시계추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나 반동의 징후는 도처에 있다. 예를 들어서 베니스에 뿌려진 그 평론가의 글도 그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반동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계추는 가던 길을 더 가야만 한다 그런 말입니다. 나의 궁금증이 일단은 풀렸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그 현대미술에 나타난 한 현상,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가보다 하고 안심이 생겼습니다. 그럴 무렵에 미국 랜싱·죤스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고 반동의 징후는 여러 곳에 있다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지난 수십 년 간 세계의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지역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참관하였습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끊일 사이 없이 고등한 가치를 탐구하고 그 흔적을 후대에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감격한 몇몇의 조형물들을 상기해 보고자합니다.
이집트 땅에 있는 룩소르의 기둥들과 아테네 언덕 아크로폴리스의 기둥들과 인도의 타지마할과 바로세로나의 성가족성당이 그것입니다. 성가족성당은 아직도 100년은 더 지어야 끝날까 말까한 건축물이고 룩소르나 아크로폴리스는 기둥들만 열 지어 있을 뿐이고 타지마할만이 완전무결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를 기초로 하고 있는 점에서는 한가지로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격은 각기 달랐습니다. 룩소르신전의 기둥들과 아직 절반의 공사가 남은 바로세로나의 성가족성당에서는 영원함과 장엄함과 초자연적인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아크로폴리스의 기둥들과 타지마할에서는 진실로 순결함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높은 지경을 만들 수 있었나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로 보였습니다. 언젠가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갔을 때 중국의 도자기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술이다 하고 나는 감격했습니다. 멕시코를 여행할 때 마침 어떤 박물관에서 마야미술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손으로 만든 형상들로 하여금 사람이 이렇게 기쁘고 감격하고 취할 수 있게 하는 저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아름다움이란 것인가. 시스티나성당 천정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을 볼 때도 그러했습니다. 한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볼 때 나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학자들이 보는 입장하고는 그런 점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태리에서 르네상스라는 시대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화가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순전한 나체를 그린 것입니다. 유럽의 미술사에서 천년이 넘게 나체그림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혁명이었습니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인습과 그 허물을 대담하게 벗은 것입니다. 그리스의 순수조형정신을 다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미술의 꽃이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절정의 시기에 미켈란젤로가 있었고 그는 생의 마지막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정신의 산물입니다. 조형미를 넘어서 정신미精神美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뒷날 아무도 그 정신을 이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바로크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인상파의 시대가 되면 이른바 의미가 예술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입니다. 입체주의 추상주의로 진행하면서 순수미의 시대가 절정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의 랜싱·존스교수가 말하는 쇠퇴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닐지 싶습니다. 처음의 반동은 13세기 고딕에서부터 이미 시작 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600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를 4천년으로 본다면 중세를 천년으로 본다면 르네상스이후 600년은 길다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앞을 보기 위해서는 지난날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간 600년은 접어놓고 우선 20세기를 보겠습니다. 조각가로 순수미의 절정을 이룩했다고 불 수 있는 부랑쿠시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자코메티가 있습니다. 시계추의 양극에 있으면서 누가 더 좋은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림으로는 몬드리안이 있고 그 반대편에 루오가 있습니다. 편의상 나는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당 세기 안에서도 반동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게 어떤 기준이 한정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스의 조형기준으로 이집트의 미美를 잰다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로마네스크시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르네상스시대의 미적 기준으로 잰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제도 아직 정리가 덜 되었습니다. 석도石濤의 그림과 다빈치의 그림을 동일한 논리로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마야의 조각들은 동서양 그리고 이집트 중동 어디의 미술하고도 다릅니다. 그러나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완성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성싶습니다. 그러기에 5천년이 넘는 조형미술의 위대한 역사가 있지만 아직도 할 일은 끝도 없는 것입니다. 각 지역마다 각 시대마다 비교되기 어려운 서로 다른 미적 기준이란 것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지금 세계의 조형예술을 총괄하면서 완전한 것은 인간이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완전이라는 말에는 이성과 감성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머릿속으로 금동미륵반가상이 떠오릅니다. 석굴암조각이 떠오릅니다. 이성과 감성에다 하나 더해서 영혼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다 하나를 더해서 거룩함과 영원함과의 통공通功함을 보게 됩니다. 예술이 예술로서 홀로 있지 않고 종교와 철학과 그리고 삶과 융화할 때 보다 풍부하고 완성에 접근한다고 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일본 교토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에다 바친 헌사를 여기 옮기고자 합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금동미륵반가상과 석굴암조각에 더 어울리는 말로 들려서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껏 예술작품에다 이러한 더할 수 없는 경의를 표한 예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술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이상을 집약한 말 같아서 입니다.
「참으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의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는 것,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넘어서 도달한 인간존재의 청정하고 원만한 그리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심벌symbol, 인간이 갖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그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징 하는 것」
순수미와 정신미, 우미優美와 장엄미莊嚴美,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영적인 것 등 아름다움의 성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완당의 세한도歲寒圖처럼 종합적으로 여러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그런 경우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석굴암처럼 높은 정신미精神美도 다시 한번 되새겨 볼일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만들 때 조형을 넘어 영적인 세계를 지향한 것입니다. 20세기의 루오나 자코메티의 경우를 생각해 보는 뜻도 그러한 것입니다. 시계추가 진행하고 있는 반대편에로 눈을 돌려보자는 것입니다. 물이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나 근원根源을 찾아가는 길은 거꾸로의 길 거슬림의 길입니다. 앙드레-말로는「역행의 미학」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천지新天地가 거기에 있을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