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6년 성서와 문화

창작과 자유

성서와문화 2010.01.19 18:04 조회 수 : 1349

 
[ 작성자 : 김 용 수 - 조각가 ]

 
햇볕은 따스하고 초록은 눈부시다. 새록새록 돋는 발밑의 작은 풀잎에서 산 빛을 머금은 강물에 이르기까지, 신록은 아이들의 노래처럼 정겹다. 사계가 명징한 이 강산, 사리가 밝은 나라. 진달래 피는 4월의 함성은 생동하는 초록빛과 겹쳐서 더욱 더 섧다.
그래서 초록은 나에게 자유(自由)의 색이다. 해자(解字)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게 自由란 글자는 밭(田)에서 싹( l )이 스스로(自) 올라오는 이치로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은 본디 자유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외침은 생명의 본성에 관한 자각에 따른 것이다. 자유가 없는 생명은 이미 생명다운 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장 속의 새가 어디 새일 수 있으랴. 따라서 자유의 억압은 곧 생명의 모독과 같다. 모든 진리가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가 자유인 까닭은 이와 같이 생명에 관한 깊은 명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창작은, 작가 스스로가 개체생명이라는 철저한 사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모든 외압을 거부하고 본성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생태계의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싹 하나가 오롯이 성장하기 위해서도 우주 이법이 작용하듯이, 작가의 창작 또한 어떤 요인으로부터 무한히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한 스승이 있어 “질서가 곧 자유다.”하시고 또 다른 스승은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면 생명이 된다.”하셨다. 질서, 자유, 생명. 그 뜻에서 나는 창조의 샘을 보고 있다.


‘물질에 질서를 부여 한다’는 것은 생명의 구속 요인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조각은 물질을 직접 다루는 일이다. 겉보기에 무덤덤한 돌, 차가운 쇠붙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재료들 속에서 생명의 파동을 즉시 느끼고, 찰나에 물성에 감응하는 일이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세계다. 이는 도사들의 특이공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작품에 몰입할 때 흔히 있는 일이다. 작품이 끝났을 때라야 내 작품이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이지, 작품 할 때는 내가 작품을 한다는 생각이 없다. 작가가 일 속에서 대상과 이분이 되면 물체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다. 작가와 대상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면 그 물체는 생명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는 자기 생각을 물체에 주입하려는 억지를 쓰지 않고 물질의 본성을 이해하여 물성이 약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질서가 곧 자유다’했을 때. 편의에 따른 인위적 질서를 생각하면 길(道)은 멀어지고 만다. 거기에는 우주에 관한 통찰이 있다. 만약 우주행성이 괘도를 이탈하여 좌충우돌 한다면 태양계는 흔적도 없을 것이고, 생명은 사라질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몸이 병이 났다는 것도 어떤 질서가 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몸에 혼돈이 왔다는 신호는 균형을 잡기위한 혼돈이지, 무질서 자체를 위한 혼돈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렇다면 자유도 일정한 여건 하에 있음을 간파할 수 있고, 방종이 어떻게 자유와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서가 곧 자유다 는 말은, 예술에 있어서 이법탈법(以法脫法)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의 요체는 - 법을 깊이 체득한 후라야 법을 부릴 수 있고, 그 법을 부리는 경지까지 가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계율과 해탈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여기서 질서[法] 속에 자유가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늠할 것이다. 창작은 바로 이 탈법의 자유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활달 무애의 상태가 돼야 모든 것을 뛰어 넘고 무 타산 무목적이어서, 마음은 허령(虛靈)해져 분별없는 지혜가 작동한다. 그럴 때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형식 넘어 형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무분별지(無分別智)는 일일이 따져서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다가온, 말 그대로 통각을 이르는 것이다. 돈오의 순간이 찰나에 있는 것처럼 작품도 찰나에 오는 것이다. 찰나는 순간의 연속선상에 있으므로 섬광 속에서 누 천 년을 감지하려면, 늘 깨어있는 삶을 필요로 한다. 언제 어느 곳에 있거나 스스로 주인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가 크면 클수록 작품의 에너지는 증가하므로, 밀도가 높은 작품은 크기가 작아도 큰 방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외로운 수련을 통하여 끝없는 자기정화를 하는 일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비우고 정화된 만큼 사유의 신축성은 더 커지고 내공은 깊어지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홀로 처연(凄然)이 갈 수 있는 힘은, 진리의 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밖에서 구하려 할 때 남의 힘을 빌리게 된다. 소위 예술의 위대함은 빽~이 없다는 데 있다. 제도나 권력에 아부할 일도 신에 기대는 일조차 거부하고,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로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없는 말, 표정 없는 표정이 인간을 정화시키는 것은 그래서 가능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의 규율과 제도는 지배를 심화시키는 억압구조다. 특히 구시대 예술은 사회 통제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제도와 통념의 장벽은 높아, 종교에 헌신하고 귀족에 봉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사회 변혁에 따른 인식의 증장과 자본의 이동에 따라 변화는 있었으나, 예술가들을 여전히 몸 쓰는 천한 것으로 폄하하였다. 하늘이 창작은 자기 특허라고 선언한 바 없고, 육체(肉體)가 천하고 정신(精神)이 귀하다한 적이 없건마는. 인간이 이를 구별하고 차별하였다. 근대 순수예술의 등장과 현대예술가의 끝없는 자기 부정정신(否定精神)은 이러한 부조리한 구조로부터 작가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모든 구속을 넘어서, 인간에 내재한 우주 본성을 추구하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때 인간의 정체성을 신(神)에 의지해 찾았으나, 여의치 않자 이성(理性)으로 옮겨갔지만 결과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근자에 인간의 본질을 창조적 인간에서 찾으려는 시각은, 인간은 본래 쪼개고 나누어서 될 존재가 아니라는 반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서양에서 칸트가 감성을 의사이성(疑似理性)으로 규명한 후. 18C 미학(Aesthetics)을 확립하고 세를 확장해 왔으나, 이성(理性) 우위 관념이 옹이처럼 굳어있었던 것을 현대과학이 풀어 해 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성(感性)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비를 열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한 역사에서 빛나는 인류문화유산은, 모두 예술가들의 숭고한 땀과 감성의 소산임을 자각한다면, 앞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 세월 먼 길을 돌아서, 인류가 예술가들에게 씌웠던 멍에가 허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예술가의 자유혼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