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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도(道)라면?

성서와문화 2010.01.19 18:01 조회 수 : 894

 
[ 작성자 : 김 용 수 - 조각가 ]

 
우리말 몸은 여럿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머리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닌, 전일된 몸이다. 더 나아가 글자를 잘 살펴보면 드는
문(口)과 나는 문(口)으로 되어 있어, 든 것은 빠져야 온전히 소통하는
생명이 된다는 구조로 볼 수 있다. 생각이 자유로이 들고 나야지, 생각이 들기만
하고 회통하지 못하면 편벽해지고. 든 먹거리가 소화되어 나오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길(道)은 소통에 있다. 소통은 흐르는 속성이 있다, 막힌
곳은 뚫려야 길이 된다. 길이 막히면 벽이 된다. 단절이 생긴 곳에 병이 생기고
두려움이 싹튼다. 그 곳에 온갖 망상이 인다. 망상은 마음의 눈을 가린다.
이것이 너나없이 수행(修行)해야 하는 이유다.


근자에 마호메트(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화로 세상이 시끄럽다. 신과 예언자를 표현하는 어떤 형상도
불허한다는 이슬람 율법을 유럽 언론이 모독했다는 것인 데, 정작 상 없는 눈으로
세상을 평등하게 보라는 요체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 다 같다. 본래
하늘은 귀하고 천하다는 생각이 없을 뿐더러, 섬기라고 한 적도 없다.
“자연이 곧 신이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인의
불행은 고향(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린 데 있다.


“ 천성산 도룡용이
바로 당신입니다.” 이것이 지율스님의 메시지다. 그가 생명을 걸고
개발지상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어도, 관심이 없는 것은 우리들의 병이 그만큼
깊다는 반증이다. 단절의 벽, 소통할 수 없는 절망이 스님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를 넘나들며 300일 넘게 행하는 지율스님의 단식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그 것을 공명심으로 폄하하는 모양이다. 조심(照心)할
일이다. 스님의 행동은 자비심에 기초하고 있다. 구도의 끝자락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연기론(緣起論)을 깊이 체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초인적인 단식에서 핵심은 평정심에 있다. 평정심의 전제는 모두를 내려 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연의 리듬을 탈 수 있고, 그 흐름을 타고 스님은
자연생명의 절규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리듬과 엇박자일 때 오랜 시간
버티기 어렵다. 관념은 하루에도 수 천 번 천상을 넘나들어도, 몸까지
아우르기는 쉽지 않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의
화려함에 가려 지나치는 단어가 있다. 행심(行深)이다. 일체가 공(空)함을
간파하는 것도 결국 행(行)을 통해야 하는 것이다. 맘과 몸이 하나로 돼야 완성하는
것이다. 등산을 생각으로만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한겨레신문 작년 12월
1일자는, 소록도에서 43년을 봉사하고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난 수녀 두
분을 소개하고 있었다. “헤어지는 아픔을 줄까봐 말없이 떠납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이 땅의 중심에서는 탐욕의 군인들이 총으로
헌정을 유린하던 ‘62년 6월, 피사렛과 슈퇴거 수녀는 꽃다운 나이 스물일곱에
오스트리아에서 전남 소록도 한센병 환자촌으로 헌신의 길을 택했다. 그
당시 환경은 열악했고 환자 수만도 2000명, 돌볼 아동 200. “일 할 수 없이
부담만 줄 수 없다.”는 떠나는 변(辯)이 더욱 가슴을 친다. 귀향 길
소지품은 이 땅을 처음 밟을 때 가져온 낡은 손가방 하나, “이 편지를 보는 당신께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 우리의 부족으로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용서를 빕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순간 난 눈물이 핑 돌았다. “용서를
빕니다.” 말이 43년이지. 그 세월을 하루같이 봉사하고도, 마지막 남긴 이
말이 심금을 울린다.
오, 또 한 분의 예수가 다녀가셨구나!


나는 가끔
성인들의 이야기는 환타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류 희원을 담아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그리워 첨삭 가감한 꿈같은 것. 그러나 내 바로 이웃에서
이렇게 예수나 부처처럼 살다가는 사람들을 볼 때, 환상은 곧 현실이 된다.
경전 속의 얘기들이 태고적 성인을 섬기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부딪고
사는 생명들 속의 신성(神聖)을 기리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도인들은
전하고 가기 때문이다.


지금 바람결에 한 소리가 실려 오고 있다. “태초에 오직
사랑만 있었나니. 죽은 후 일은 나(神)에게 맡기고. 살아서 너희가 할 일은
다만 사랑 뿐이라. 원수가 곧 너이고, 남이 곧 너이니. 신을 섬기듯 이웃을
섬겨라. 그러하면 천지가 교당 아닌 곳 없고, 법당 아닌 곳
없느니라.”


사랑이 곧 도(道)라면? 노자가 웃으실까, 하느님이 웃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