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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재와 음악

성서와문화 2010.01.19 17:55 조회 수 : 1315

 
[ 작성자 : 허 만 하 - 시인 ]


육십령재에서 만났던 눈은 엷은 대로
길에 쌓여있었다. 그늘진 곳에서는 노면이 얼어붙어 어스름 속에서 뿌옇게
번들거리기도 했다. 호남 내륙지방에 들어서자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길가
표지석들은 소복하게 쌓인 흰 눈을 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
만났던 임실(任實)은 연푸른 어둠에 쌓여 있었다. 오렌지 빛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흰 눈에 안겨있는 밤의 임실을 먼눈으로 바라보며
스치다시피 이 고을을 지냈던 것이다. 그 때 성가리(城街里)라는 마을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버렸던 것이다. 밤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4년 전의
어느 여름날 임실의 이도리 시장 터를 어슬렁거리다 다시 길을 순창으로
잡았을 때 나는 길에서 멀지 않는 나지막한 야산의 초록색 소나무 숲에 백로
떼가 조밀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림으로 수 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흰 시멘트 건물이 보이는 이 마을이 성가리였다. 한낮의 이 마을을 멀리
바라보았을 때 뜻 밖에도 내 가슴 속에 아득한 기억 같이 떠오르는 한 선율이
있었다. 앞뒤가 분명치 않는 대로 그것은 바하의 마태수난곡에 나오는
아리아의 한 토막이었다. 그 멜로디는 시를 사귀던 무렵의 젊은 나를 떠올려
주었다. 무던히도 음악다방을 찾아 다녔던 무구했던 시절의 나. 무거운 해부학
원서보다 카뮈의 문체가 더 무거웠던 시절의 나. 이 성가리란 마을이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섰던 것은 의예과 학생시절의 내가 출입했던 고전음악
다실<르네상스>의 주인이 이 마을 태생이었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호남
갑부의 아들이라 수군거리기만 했던 르네상스의 주인은 이 성가리에서
태어나고 이곳에 있는 임실소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나는 벽처럼 정면에 쌓여 있던
레코드 음반 앞에 드물게 모습을 내비치던 그의 모습을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바라보았던 일을 생각했다.
그 음영은 때로 시인 전봉건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산맥을 넘어 온 먼 바람에 철새 깃 소리가 묻어나는 가을의 어느 날,
대구 도심지 향촌동의 한 골목안 좁다란 공간에서 바하의 <마태 수난곡>이
장엄하게 울렸다. 1951년의 일이다. 그것은 분명히 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대구 향촌동에 대구 문화의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신호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청중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으로
박용찬(朴容讚,1928-1964)이란 사람과 젊은 시인 전봉건(1928-1988)이 있었다.
박용찬씨는 1천장이 넘는 귀한 레코드 원판을 트럭에 싣고 질퍽한 눈길이
얼어붙는 한 겨울,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우연히 들어선 대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북의 안주 출신으로 일찍 월남했던 전봉건은 6·25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이등병으로 종군, 중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육군
병원을 거쳐 제대한 몸으로 혼자서 대구에서 어려운 생활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박용찬씨를 만나 고전음악 다실 르네상스를 여는데 적잖은 힘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전봉건이 발표했던 「음악」이란 시가 그들 만남의
계기가 되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유난히 더웠던 1951년의 여름을
피난길에 있던 연대생 환운헌(나중에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절차를
마치고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다 브라질로 이민, 그 곳에서 별세했다)과 함께
이 음반을 분류하고 정리했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전봉건은 이 음악
다실에서 한동안 DJ로 일하며 지냈다.
내가 서정주와 김영랑의 추천으로
『문예』의 등단절차를 마친 이 훤칠한 키의 시인 모습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이 다방에서였다. 그들이 개업 첫날 선택했던 곡이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마태 수난곡이었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같은 살벌한 지명에서 화약
냄새가 풍기던 반도의 가을에 이 르네상스의 선율은 해맑은 여울물처럼
사람들 가슴을 추겼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위대한
역설이었다. 임실을 지날 때 내 머리에 떠올랐던 가락은 마태수난곡의 아리아의 한
토막이었던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득 전봉건 시의 특징의 하나인
빈번한 되풀이는 이 시절에 그가 들었던 음악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에 나오는 주제음의 되풀이를 생각했다. 전봉건은 한
글에서 그의 이 시절을 「50년대의 대구시절」이라 이름 짓고 있다.
내가
임실에서 보았던 것은 수백 마리의 백로들이었으나, 그 길 위에서 내가 또
보았던 것은 임실과 대구를 잇는 명주실처럼 반짝이는 인연의 선이었다. 그 선은
다시 이북의 도시 안주의 풍경에 이어졌다. 나는 6·25 동란이 일어났던 그
해 겨울, 전봉건의 고향인 이 낯선 도시를 군번 없는 학생의 신분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안주 교외의 변전소 창고에서 카빈총을 가슴에 안고 고향
대구의 거리를 떠올리며 슬리핑 백 안에서 혼자서 흐느꼈던 경험이 있다.


지명은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 이름 뒤에는 한정 없는 인간의 드라마가
숨어 있는 것이다. 임실과 대구와 안주를 잇는 삼각형도 예외가 아니다.
길섶에 부용화가 아름답게 피어 있던 모래재를 넘기 전에 보았던 임실의 이름
없는 한 마을 지명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르네상스>가 나에게는 단순한
음악 다실이 아니라 내가 시를 만나고 사귀었던 잊을 수 없는 나의 한 시절의
기호(記號)가 되는 것과 같다.
나는 순창의 회문산 정상 가까운 높이에서
그 너머 임실이 있을 법한 산맥의 물결을 바라보며 고을과 고을을 잇는 그런
선의 실재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연말이면 수도 없이 많은 카드나 연하장이
바다를 넘고 대륙을 넘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 카드나 연하장들 궤적을
그대로 지구 위에 그리면 지구는 교차하는 아름다운 선으로 덮여 있는 털실
뭉치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 이런 말을 날짜 변경선 너머 있는
딸에게 한 적이 있다. 영남의 땅과 호남의 땅 사이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산
덩어리를 넘는 육십령재를 내가 처음으로 밟았던 것은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 발걸음이 공연히 바빠지는 오륙년 전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라는 내 작품은 그 길에서 얻었던
한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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