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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견절변당(花見折弁當)

성서와문화 2010.01.12 21:03 조회 수 : 1251

 
[ 작성자 : 이상범 - 신학 ]


시인 김소운의 익살 한 마당. 특강 강사로 오신 선생이 칠판 가득히 “화견절변당”이라 쓰시고, 뜻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 하셨다. 6.25 전쟁이 한참이던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일이다. 아무도 손을 드는 이가 없자, 이번에는 한자로 花見折弁當이라 쓰셨다.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은 대개 선생님들이셨다. 그도 그럴 밖에 ‘화견절변당’은 한국어가 아닐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한자어도 아니고. 순전한 일본식 조어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꽃피는 봄철이면, 서울의 충무로나 부산 광복동 일식집 앞에서 “花見折弁當”이라 크게 쓴 입간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나서도 그와 같은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 한자는 일본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화견절변당(花見折弁當)은, 일본 사람들이 “꽃구경을 위한 도시락”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말로는‘하나미오리벤또’로 읽는데, ‘하나미’는 꽃구경이란 말이고‘오리벤또’는 나무를 종이장처럼 얇게 저민 것을 접어서 만든 도시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친구>를 일본에서는 <찡구>로 음역해서 광고를 내달았다. 친구에 해당하는 일본말이 없을 리 없다. “도모”나 “도모다찌”가 일본어로 친구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은 일본어를 배우지 않는 사람도 알 수 있을 법한 단어이다. 그런데 구태여 ‘도모다찌’라 붙이지 않고 ‘찡구’로 붙인 속셈을 헤아릴 길이 없지만, ‘친구’와 ‘도모다찌’는 그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서가 아닐까싶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동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었다. 공산당원 끼리 동지라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동무라는 말이 보편적이었다. 오히려 또래아이들 끼리 동무대신 ‘친구’를 쓸라치면 건방진 아이로 몰릴 수 있었다.‘어깨동무’‘새 동무’는 동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어휘였지만, 해방과 6.25 전쟁 사이에서 동무는 공산당원들의 독점 언어가 되어 버렸고, 보통시민들 사이에서는 사용을 기피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소탈한 관계에서는 동무라는 말을 예사로 썼었지만, 해방 공간에서는 좌익 편에서 동무, 우익 편에서는 동지라는 말을 썼다.
1952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한 대학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옆 자리의 학생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귀를 기울이니 “아미 우달, 아미 우달......”을 되풀이하고 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연습장에서 공부의 흔적을 훔쳐보았다.‘아미’는 불어의 아미였고 ‘우달’을 거기에 해당하는 우리말 번역어로 알고 막무가내로 익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불어‘아미’가 무슨 뜻인지는 불어를 공부하지 않은 이라도 알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 그리고 그 번역어는 ‘친구’ 아니면 ‘동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달(友達)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당시에 부실하게 만들어졌던 사전이나 단어장 때문이었으리라.


우직한 친구의 모습이 성경 일백 독을 마치고 이백 독에 도전하신 나의 어머니의 모습과도 겹쳐진 것은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이다. 어느 날 아침나절이었다. 특유의 억양과 낭랑한 목소리로 창세기를 읽어나가시는데, “.......개동시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창44:3)하고 읽으신다. 뜻을 알아차릴 수 없어 여쭈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신도 모르시겠다는 대답이시다. 그 자리에서 당시 막 출판된 ‘공동번역판’에서 해당되는 구절을 펼치니“.......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나귀를 이끌고........”로 되어 있었다. ‘개동시’는 한자로 開東時, 즉 동편이 열리는 때란 뜻으로 아침이란 말이었다. 민망하게도, 신구약 이백 독에 도전하신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드릴 자료는 속출했다. 이사야 26장 2절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나라로 들어오게 할찌어다.”에서‘신’은 신발이 아니란 것쯤은 쉬 알아차리겠으나, 새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더욱이 그 신이 신(神)이 아니라, 신(信)이란 것을 나의 어머니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읽을 수 있을까? 다니엘서 10장13절, “바사 국군이 이십일일동안 나를 막았음으로.......”에서 ‘국군’은 國軍이 아니라, 國君임을 알아차리고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꼬? 사도행전 4장36절,“.......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에서 권위자는 權威者가 아니라, 勸慰子-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란 여기서만 쓰이는 특수 조어임을 알고 읽는 독자는 또 얼마나 될지?
“성경 말씀은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입버릇처럼 뇌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