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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동 시절의 숙제

성서와문화 2010.01.12 21:00 조회 수 : 1151

 
[ 작성자 : 허만하 - 시인 ]


전라남도 보성을 지나 장흥에 이르는 길은 감나무 재를 지나게 된다. 이 재를 넘어서서 다시 구름재 내리막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나도 몰래 탄성을 질렀었다. 느닷없이 은백색 빛을 머금고 있는 산봉우리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1월 17일의 일이다. 그것은 내렸던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봉우리들이었다. 멀리 따로 떨어져 있는 봉우리는 저 나름대로 으젓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6.25 한국 전쟁 때 이북에서 조석으로 보았던 낯설지 않은 풍경이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그 날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였다.
1950년 늦은 여름에 낙동강 전선(대구 근교 화원)에서 군번도 없이 영국군 통역으로 종군하게 된 나는 중학교 6학년(지금의 고3) 학생이었다. 그 길로 나는 완전히 한 겨울을 이북에서 지나게 되었다. 속절없는 외로움 속에서 그 때 바라보았던 북국의 설경이 느닷없이 장흥의 겨울 풍경에 겹치며 떠올랐던 것이다.
이 설경은 또 다른 젊은 날의 내 정신풍경을 떠올려 주었다. 지난해 초겨울에 썼던 「대구 향촌동에서」라는 내 시가 그 풍경을 그리고 있다. 대구 두류공원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 참석했던 나는 공식행사가 끝나자 향촌동을 찾았다. 언젠가 이 <성서와 문화>지에서 한번 훑어 본적이 있는 그 구역이다(「 아름다운 우정의 계절」). 내 젊은 시절이 살아 있는 향촌동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 일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목표가 됨직한 지표는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체재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의 젊은 시절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내 느린 발걸음을 따라 떠오르던 시상을 거의 즉흥적으로 옮긴 것이 이 작품이다. 울산의 젊은 시인들의 모임인 〈수요포럼〉의 청탁에 나는 이 작품으로 응했다. 이 시에 나오는 빙하의 이미지에는 이북에서 보았던 눈에 덮여 있던 산의 광경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구 향촌동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던 터전이다. 그것은 해방 후 내 의식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던 역사적 필연성이란 위협적 개념의 허구를 깨달았던 때와 겹치는 지명이다 .의과대학 학생으로 시의 길에 들어섰던 나는 자연과학적 세계상과 시의 길 사이에서 방황했었다.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가치와 규범에 나는 회의를 품었었다. 그 회의가 시의 씨앗이었다. 특히 갈림길에서 인간이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실천에 책임이 따르며, 이 선택에 실존이 스스로를 들어낸다는 사상에 매력을 느꼈던 풋풋했던 삶의 한 계절. 실존이 본질을 선행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시절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풍경처럼 바라본다.


대구 향촌동에서


나이가 드는 일 그것은 자기 청춘을
세월 속에서 조직하는 일이다- 엘뤼아르


전쟁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미군 작업복을 물들여 입었었다
몰아치던 눈보라 속에서
벼랑처럼 서서 기다리던
신안주, 박천, 태천
생소한 이북의 지명과 함께
가혹한 한 겨울을 지낸
내 야전잠바도 포도주색으로 물든 때
겨드랑에 끼고 다니던 해부학 원서보다
무거웠던 까뮈의 문체
음악을 찾아 지하실 열 세 계단을 밟았던 때
우리들은 흙이 없는 빙하에서 피는
꽃을 노래했다
포도주색 노을이 지붕의 물결 넘어
멀리 달성공원 하늘에 번져날 때
잔을 넘치는 막걸리색 우정을 들이키며
저마다 고유한 은유가 되었던 계절
『시와 비평』이 태어난
향촌동에서 만났던 청순한 한 계절
젊었던 이 길에서 하나가 된 아내와
기억의 숲을 헤치면서 걷는 2003년의 가을
가슴속에 떠오르는 반세기의 지평선.


청운의 꿈을 품고 대구의 거리를 함께 걷다가 같이 대구 역 뒤쯤 어딘가에 있던 훈련소에서 지냈던 동창의 친구 K도 (함께 『팔공과학』이란 동인지를 내기도 했었다) 전선에서 돌아왔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하나 둘 모여들었다. 거리에 구제품과 가짜 위스키와 낯선 사투리가 넘치던 때였다. 칠성동 어딘가에서 2주일 남짓한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을 때, 번호 하나의 차이로 그는 먼저 군용 트럭을 타고 손을 흔들며 먼지 속으로 사라졌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낙동강 전선의 끝머리 마산지역 미군부대에 배치되었던 그도 서부전선을 따라 북상했었다. 우리는 물론 서로의 소재를 몰랐었다. 미국 SIU대학교 교수로 있는 그는 최근에 하이데거의 「들길」 영역 코피를 나에게 송부해주었다.
나는 「들길」을 읽고 하이데거가 시인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짧고도 아름다운 에세이의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다음 표현은 인상적이다. “별빛 아래서 길은 희미하게 번득인다, 성곽 뒤로는 성 마르틴 교회 탑이 솟아 있다. 천천히 거의 망설이듯 시간을 말하는 열한 번 종소리가 밤 속으로 사라져 갔다.〔…〕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 고요는 더 고요한 것이 된다.” 그는 철학자이면서 분명히 시인이었다.
일본이 낳은 철학자 니시다 기다로(`1870-1945)가 그의 글에서 철학에는 논리적 능력만이 아니라 시인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미래의 진로를 앞두고 갈림길에 섰던 고등학교 학생시절을 회고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지음에 이르러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는 “모든 사색은 시 쓰기이며 모든 시 쓰기는 사색이다”라 말했었다.
독일의 서남부 다뉴브 강 상류와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알프스 산 덩어리가 끼고 있는 고원에 있는 메스키르히 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그는 만년에 이 고장 보리밭과 목장 사이를 흐르는 들길을 걸으며 그의 사유를 갈고 닦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래 내가 하이데거의 저술을 다시 읽게 된 것이 열세계단을 밟고 내려가던 고전 음악 다실 〈녹향〉시절의 숙제 때문인지, 이마에 흰눈을 이고 기다리던 어느 날의 장흥 산봉우리의 유난히 명징하게 보이던 한 순간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