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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름다운 것

성서와문화 2010.01.12 20:59 조회 수 : 1007

 
[ 작성자 : 한승호 - 감리교 시온교회 명예목사 ]


지난날을 회고 해보면 감회가 깊습니다. 그래서 회고담에 덧붙여 그 동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묶어 몇 자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자그마치 58년 전 8.15 해방 그 다음해 내가 태평양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이미 친분이 두터웠던 안상현씨가 느닷없이 저희 집에 찾아와 성화신학교 배덕영 교장이라는 분이 나한테 가서 성화신학교에 들어와 당신을 도우며 같이 일할 생각이 있는지 타진해보고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세길 네길 뛰며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하시는군요 하며 배 교장이라는 분이 저를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 분이지 될 뻔이나 한 이야기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솔직한 이야기로 나는 그 당시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고, 더구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소위 <교회>에 대해서 1848년 <공산당 선언>문을 작성했다고 알려진 레닌(Lenin)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예수교회다. 그러나 예수가 지금 세상에 오신다면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그 분의 제자가 되겠다.” 이 말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뿐만 아니라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신학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먼 공부를 했었다.
안상현씨는 이러한 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실제 신학교가 시작 단계라서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정말 없어서 그러니 꼬치꼬치 이론을 달지 말고 신학교로 들어 오라고.., 정 가르칠 과목이 없으면 영어라도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고.., 그 분은 집요했고 나는 마음이 약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해서 그만 그 능란한 말솜씨에 넘어가고 말았다. 월급도 제대로 못 줄 것이라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그 때 내 나이 약관 26살. 그리고 나서 얼마가 지났는가 똑똑히 기억이 안 되지만 학교가 꽤 틀이 잡혔고, 학생 수도 많아져 학교 꼴이 나게 됐을 무렵 본과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켰다. 데모를 주도한 학생은 김석홍 이란다. 그 어려운 공산치하에서 신학교 운영이 수월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만 가지 어려움을 돌파하고 단결해서 오직 믿음으로 교수들과 학생 전체가 똘똘 뭉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돌파해 나가기 어려운 판인데 <데모>라니 못 된 놈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데모>인가? 도대체 이슈가 무언데 하고 알아 봤더니 놀랍게도 <한승호 나가라!> 이것이 슬로건이 아닌가. 천만 뜻밖이다. 나는 어디 가서 환영은 많이 받아봤으나 쫓겨나 본적은 없거니와 안 오겠다는 사람을 제발 부탁이니 와달라고 애원해서 데려다 놓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며 제 깐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믿음을 있는 척 해가면서 분투노력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나 보고 <나가라!!!> . 그러나 알고 보니 김석홍의 말이 너무나 타당한 말이 아닌가! 한승호는 신학교 졸업생도 아니고 목회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신학교 조교수가 될만한 조건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신학교 교무과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 되는가!!> 너무나 지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학교에 일찍 나가 배 교장님을 뵙고 학생들의 데모의 명분이 너무나 지당함으로 이것을 받아 주시라고 말씀드리고 미리 준비했던 나의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 때 배 교장님께서는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라시면서 하시는 말씀, <한 선생!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신학교를 살려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분하지 말고 학교를 떠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강구해 보십시다.> <교장 선생님!! 저는 학교를 떠나지 않습니다. 학사 편입하기를 원합니다 허락해주세요.
다음 날 저는 2학년에 입학을 허락 받았고, 학생으로서 다음 날 책가방을 끼고 당당 성화신학교 본과 제2학년 학생으로 내 팔자에 없는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비록 신학을 공부는 하지만 직업종교인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굳게 다짐하면서 . 왜냐하면 보통 평범한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것은 좋지만 종교를 직업으로 하는 목사가 되는 것은 왠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생 생활을 하면서 소위 자연아 로 살 것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신학도의 길이 6.25 사변으로 부산으로 피난 와 결국 부산 시온교회를 시작하게 됐고 그 때부터 시작한 목회생활이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 뜻과 상관없이 목사로서 일생을 살게 될 줄은 하나님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나의 신학이라는 학문과 인연을 맺게 된 경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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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온교회를 은퇴한지 꼭 11년 되는 해 2003년 봄 어느 날 새벽 5시 반, 잠결에 화장실에 갔다가 그만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넘어졌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방에 들어와서 다시 잠이 들었고 한잠 자고 아침 7시에 의복을 주섬주섬 입고 거실에 나오기 까지는 했는데 그 다음 다시 일어서려고 하면 쓰러지고 일어서려고 하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거동을 할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앰블런스를 불러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진단을 받아보니 뜻 밖에도 <뇌경색>, 뇌의 핏줄이 막혀 오른 쪽 팔 다리에 마비가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오른 쪽 팔 다리가 전연 움직이지 않으며 심지어 입의 혀까지 절반이 마비가 돼 입맛을 똑똑히 알 수가 없고 밥을 먹으려면 사래가 들려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중풍이라는 것이고 성경에서 때때로 읽는 반신불수 바로 그 것인 모양이다. 응급실에 3일간 있다가 신경과 입원실로 올라갔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라서 정신적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환경의 변화에 정서적으로 적응하지 못 한 탓인지 밤에 잠을 통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의 간병인 아줌마가 나보고 왜 밤에 잠을 못 자냐고 묻길래, 농담으로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느라고 잠 못 잔다 했더니 <아니 목사라는 분이 여태 그것도 모르시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아줌마는 아시오?> 했더니 담박 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습니다.> <뭔데?> 아줌마는 대스럽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이 쉽게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인생은 그저 그렇쿠 그런 겁니다.> 지금도 그때 그 아줌마의 말이 심심치 않게 이따끔씩 머리에서 맴돌곤 한다. 입맛을 몰라 밥을 먹지 못 하고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눕지를 못 하고 심지어 혼자서 앉아 있을려면은 오른 쪽으로 자꾸 쓰러져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바로 이런 것이 지옥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시작 된 나의 병상생활은 서울대학 병원에서 2개월, 고려대학 병원에서 4개월, 도합 6개월 동안의 입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 집에서 통원 치료를 받은지 이제 1년 가까이 됐으니 발병한지는 1년 반이 된 셈이다.
서울대학 병원 입원실은 2인실이라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고대 입원실로 옮긴 후로는 6인실이라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비유해서 말했다. <목포행 완행 야간열차 3등 칸 같다.>고.. 밤새 앓는 소리하는 환자, 목에서 가래를 빼내는 소리, 때때로 죽어나가는 환자와 통곡하는 식구들, 밤 12시쯤 돼서 병문안 오는 무례한 방문객들, 늦도록 자지 않고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환자들.. 이래저래 6인실 입원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시온교회 담임목사가 병원으로 심방 오셔서 예배를 간단히 보시고 가시면서 교인들이 한 목사님을 위해서 헌금을 했다면서 봉투를 하나 나에게 건네주었다. <한 목사님! 이 돈으로 2인실이나 3인실로 옮기세요.> 아마 6인실에 있는 것이 내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 병실에서 방문객 제일 많은 사람이 나인데 손님들이 오시면 앉을 의자도 없고 둘러서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도 없어 민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나 자신이 생각할 때에도 내가 뭐 그렇게 잘 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직 시온교회 담임목사였고 대학교수로 30년이나 봉직했던 사람이라면 2인실이나 최소한 3인실에는 있어야 내 체면이 서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나 자신을 책했다.
요즘 사회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교회가 너무 비대해지는데 따라오는 교회의 세속화 현상, 동시에 교회 목사들의 기름진 모습, 특히 고급 승용차, 호화로운 생활, 마치 재벌 그룹의 총수를 연상케 하는 어마어마한 세속적 권위, 그것을 모방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중소 교회 목사들의 애처로운 모습 등, 성직자라는 호칭과는 너무 거리가 먼 양상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들은 옛날의 선비들처럼 청빈(淸貧)스러운, 청담스님처럼 무소유의 흉내는 못 내더라도 그런 분위기라도 내보자고 말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성직자라는 말이 너무 부담스럽다며 그 단어를 쓰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속물(俗物)스러운 모습은 버리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 오던 내가 아닌가? 그러던 내가 6인실 입원실에 입원하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아니 창피하게 생각하는 <나> 라면 그 <나> 라는 인간은 말 그대로 위선자 아니면 이중인격자 아니면, 자기 아닌 자기를 주장하는 강단에서의 거짓말쟁이에 불과하지 않는가? 중국의 옛 현자(賢者) 장자(莊子)가 한 말, 부지연이연(不知然而然)이란 옛글이 생각난다. <목사로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진짜 목사다.> 이 말이 뼈저리게 가슴에 닥아 온다. 목사가 뭐길래. 대학교수가 도대체 뭐 말라빠진 건가 이것은 분명히 세속적 권위주의 산물이고, 성직자라고 자처하는 목사들은 최소한 그 정도의 속물성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입원생활 6개월을 통해 커다란 것을 깨달았다.
작년 4월에 발병하여 오늘까지 병상생활 1년 6개월 동안 또 한 가지 큰 소득이 있다. 사랑의 위력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병이라고 해서 실의에 빠져있는 나에게, 가까운 친구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위로 그리고 간곡한 기도, 제자들의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헌신적인 돌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무색케 하는 자식들의 경제적 후원 그리고 아내의 헌신적인 그야말로 눈물겨울 정도의 희생적인 간병,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산다는 것의 참 맛을 깨닫게 하는데 충분했다. 다시 말해서 <삶은 아름다운 것>을 실감하게 했고 <인생은 살아 볼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저는 지금 큐 케인(지팡이)을 짚고 겨우 집안에서 왔다 갔다 연습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매일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워낙 나이(83세)가 많기 때문에 빨리 재활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재활이 되는 그 날까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날이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왠고하니 인생은 항상 과정에서 살고, 그 과정에 충실 하는 것이 인생을 성실하게 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확신하는 바를 알려드립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