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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루이 17세의 마지막 가는 길

성서와문화 2010.01.12 20:56 조회 수 : 1556

 
[ 작성자 : 손규태 - 성공회대학 교수,신학 ]


2004년 6월 8일 화요일 파리에서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17세의 장례식이 있었다. 아니 200년 동안
유리병에 간직되어오던 그의 심장을 땅에 묻는 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서 프랑스
제국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막을 내린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래 사람들은 이 액체에 담긴 유리병 속의 유물의 진위를
놓고 많은 논란을 빚었다. 독일과 벨기에 의사들이 유리병 속에 들어있던
굳어진 심장을 DNA검사를 통해 그것이 오린 왕 루이 17세의 것임을 밝혀냈다.
마침내 이 부루봉가의 마지막 왕의 심장이 상 데니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에
안장된 것이다.
루이 17세는 1785년 3월 27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루이 자비에르 요셉이 1789년에 죽자 그가
황태자가 되었다. 형이 죽고 곧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일곱 살의 황태자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투어 데 템플에에 유폐 된다. 왕 루이 16세가
1793년 참수 당하자 그의 아내 마리 앙뜨와네트는 감옥에서 둘째 아들인 그를
왕으로 삼아 루이 17세로 명명했다. 유럽의 왕실들도 그를 왕세자로 인정했다.
10개월 후 마리 앙뜨와네트도 처형당한다.
어린 왕은 병든 채 홀로 감옥에
남겨졌다. 의사들의 도움도 헛되어 10살 난 어린 왕은 1795년 6월 8일
사망했다. 의사 펠레탕(Pelletan)이 검시관으로 참여했고 공식적 장례절차 없이
시체는 어디론가 버려졌다. 의사는 그 당시 루이 17세의 심장을 도려내서 자기
집으로 가져가 알코르에 담아 유리병에 보관했다. 그 후부터 프랑스에서는
여러 가지 풍문이 나돌았다. 그 어린 왕이 정말 죽었는가? 그는 비밀리에
석방되어 다른 이름으로 살아있는가? 등등. 19세기 초, 루이 17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1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의사 펠레탕이 왕의 심장을
담아 두었던 크리스털 병은 오래 동안 혁명과정과 그 이후 갖가지 곡절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 이후 이 크리스털 유리병은 성 데니의
성당에 안치된다. 그렇지만 이 유리병 속 알코르에 들어 있는 심장이 진짜 어린
왕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러한 의문은 지난 4년 전부터
착수된 과학적 검증에 의해서 풀리기 시작했다. 독일 뮌스터에서 벨기에와
독일 의사들이 그 심장이 정말 마리 앙뜨와네트의 가문의 피가 섞인 것인가를
조사했고 결국 그것이 진짜 루이 17세의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루이 17세가 죽은지 200년이 되는 날인 6월 8일 때늦은 장례식이 과거 왕가의
전통에 따라서 거행되었다. 이 유물은 파리에 있는 왕가의 교회인 성
게르마인 라욱세로이를 떠나서 9세기부터 만들어진 부루봉 왕가의 묘지에 묻히게
된 것이다. 메로빙거, 카페팅거, 올레앙, 발로이 가문 출신의 약 800여명의
왕들과 왕자들 그리고 군주들이 이 묘역에 묻혀 있다. 이 어린 왕 루이
17세의 심장도 프랑스 왕들 사이에 있는 부모 곁에 묻히게 되었다. 이 장례식에
유럽의 수많은 왕가들의 우두머리들과 귀족들이 참여하여 시체 없는 장례식을
치렀다. 한 부루봉가의 대변인은 “그의 심장은 끔찍했던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상징의 메시지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이 비정치적인 행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도 이 행사가 하나의 사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서 정부관리나 의회의원 누구 하나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 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가
말해주는 대로 이 혁명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정치적) 자유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제군주체제에서부터 공화제로 넘어감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왕의 전제통치를 받지 않고 그들이 선출한 의회를 통해서 스스로
통치하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당시의 혁명적 사상가들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다.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영역에서도 실현된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활동의 중심영역이었던 시장이
군주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른바 시장의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누구든지
군주들이나 영주들의 통제나 허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시장 경제” 즉 자본주의의 원리가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장의 자유는 국가간의 상거래인
무역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국민국가 이후에도 약 200년 동안이나 국가의
통제를 받던 국가간의 무역은 오늘날에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통해서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 돈만 있으면 어느 나라에 가서 어떤 장사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정치의 자유, 경제의 자유,
무역의 자유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한편 이 프랑스
혁명의 이상들 가운데 “평등”과 “형제애”라는 이상은 19세기 중엽부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통해서 발아되어 성장했다. 자유라는 이상을 실현한 새로운
부루조아 계급에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프로레타리아트 계급의 처참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유 대신 평등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이 운동들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통해서 그 결실을 거두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실험은
업적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원리에 반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고도의 도덕성과 공동체적
“형제애”(박애)의 결여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패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이념과
거기에 기초한 세계자본주의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들 가운데 오직
“자유”라는 이상만이 과도하게 실현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자유의 관철의 결과는 어떤가?
이것은 사람들을
무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어서 무한한 자유 가운데서 선택의 자유가 점점
없어진다. 일자리를 예를 들어보자. 잘 교육받은 사람들도 일자리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때로는 선택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다. 오직 강자나 부자의 자유는 늘어나지만 약자나 빈자의
자유는 점점 줄어든다.
또 오늘날의 세계는 더 풍요롭고 번영을 누리지만,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소수 강자들과 부자들의
행복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신용불량자들이다. 그들은 풍요와 번영에서 제외되지 않으려고 부자들의 돈의 함정에 빠졌고
부자들은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부와 번영을
누린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이 지향했던 이상들 중 오직 자유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즉 세계화의 결과다. 인간의 평등이라든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성의 표현인 형제애가 사라진 세계, 즉 신
자유주의의 세계를 마지해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희생된 루이 17세의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 자유로 인한 비극적 현실을 성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