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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그 갈등의 역사

성서와문화 2010.01.12 20:50 조회 수 : 905

 
[ 작성자 : 김용기 - 전 고려대 교수 정치학 ]


아침저녁으로 TV에서 중동의
참상을 보게 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수십년동안 싸우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이 지역은 수차례 이스라엘-아랍간의 중동전을 치르며
크나큰 인명손실과 국제적 문제를 야기해 왔다.
이 지역은 세계 3대 종교의
성지이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이 접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띄고
있다. 주민들은 아랍인,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소수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종교적, 인종적 뿌리를 가진 민족들이 이
좁은 땅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정치공동체를 형성할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가?’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족운동 발전사를 검토하고
평화적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천년이나 디아스포라 되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집단이주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온주의운동과 영국의 위임통치였다.
동유럽에서 건너온 청년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 각지로부터 박해받던 유대인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정주민들과의 갈등이 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여러 차례
양 민족간의 유혈충돌이 내전과 같은 심각한 상황을 야기 시켰다.
1948년 5월
14일, 1947년 11월 29일에 통과된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의한 유태인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건국선언은 이웃 아랍국가인 시리아, 트랜스요르단, 이집트,
이라크 연합군이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영토,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차지한 이집트영,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요르단
주변지역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쪾범아랍주의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1차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유태민족과
아랍민족에게 전쟁이 끝나면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시켜줄 것을 협정으로
각기 약속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들어간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갑자기 불어 닥친 민족국가 체제는 범아랍주의와
긴장관계에 놓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중동지역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팔레스타인 분쟁은 아랍과 이슬람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지원은
이렇게 범아랍주의(까우미아)와 국가주의(와따니야)의 갈등관계 속에서
미온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민들에 대한 범아랍주의의 전파는 수사적인 수준에 그쳤고
권력기반을 다지는데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은 그
전기를 마련하였다. 낫세르의 범아랍주의가 중동전체를 뜨겁게 달굴 시점에
벌어진 이 전쟁은 범아랍주의의 한계와 국가주의의 부상을 가름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중동권에서 세 차례에 걸쳐 거듭 패배하며 이 전쟁으로 이집트,
요르단 체제 아래 있던 영토마저 이스라엘의 군사통치 지역으로 복속되었다.
실망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독자적이고 통일된 조직만이 희망임을
확인했다.
쪾민족운동의 구심점
1964년에 이미 결성되었던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전쟁 이후 실질적인 면모를 갖추고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최대
정파였던 파타파의 지도자인 아라파트가 69년에 의장으로 당선되었으며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국가 건설을 주창하였다.
요르단에 본부를 두었던 이
기구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하고 요르단 왕국을 비난하고
전복을 꿈꾸는 등 양면성을 띄었다.
PLO는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의
난민촌을 중심으로 세력화해 갔고 국제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적인 대표성을 띄었다. 하지만 요르단에서 레바논, 다시 튀니지로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쪾인티파다 자생적 민족주의
또 다른 역사적 계기는 1987년 말
점령지 내부에서 점화되었다. 한 소년의 죽음으로 발발한 대규모 주민 봉기인
인티파다(Intifada)는 기존의 PLO 주도의 조직적 저항이나 외부 아랍세계의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자생적 민족주의는 그 동안 명분상에
그치던 독립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지지부진하던 독립국가 건설과 양국의
공존방안에 물꼬를 튼 것이다. 자생적 민족운동 앞에 국제적 여론이
호의적으로 변모하였고 요르단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의 주권을 표기하였다.
급기야
PNC(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선포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정부가 양립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PNC의
온건파 역시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응할 용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쪾아라파트와 하마스
문제는 걸프전쟁 이후 국제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온건파와 하마스
등 과격파와의 노선분쟁이었다. 아라파트를 중심한 온건파는 세속국가를
지향하며 이스라엘의 실체를 인정하는 화해정책을 폈다. 반면 인티파다를 통해
급부상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야신과 그 일파가 지도하는 하마스
조직으로 신정국가 건설을 주창했고 이스라엘과의 무장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평화를 위해 영토를 포기한 이스라엘 노동당과의 협상이 진척되고 마드리드,
오슬로 회담으로 급물살을 탄 평화회담은 1999년까지 점령지내 자치정부를
주권국가로 완전 이양하는 방안을 확정지었다.
두 민족의 온건파들이
수십년동안 어렵게 확인한 평화의지와 실천방안은 심각한 현실적 장벽에 부딪혔다.
양측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반감이나 종교적 극단주의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하마스는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통해 협상력을 높이려 하였고 샤론의
리쿠르당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완전 복속시키기 위해 그 동안의 협상결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과격파의 득세는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왔고 양측의
치명적인 인명손실을 가져왔다. 협상의 제고를 위한 과격파의 입지를 용인한
것은 실수였다.
민족국가를 세우는 데는 영토가 필수적이다. 아랍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없이 피를 흘리며 서로 죽이고
죽고 있다.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종교적 요소는 중대하다. 그것은
특히 정치적 경제적 이념이나 수단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될 때 궁극적인 수단으로 선택된다.
어느 종교든지 정통, 근본, 원리 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파가 있다. 서로가 “요르단에서 지중해까지”를 내
민족, 내 종교가 차지하기를 바란다. 알라이든 야훼이든 유일신은 절대신이요,
지구상에 상대가 없는 것, 한 분뿐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뿐인 이 신을
다른 거리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를 저주하고, 그 신을 믿는 사람을
폭탄테러하고, 미사일 공격하고, 자살하며, 지하드라고 하늘을 우러러 손을
벌리고 감사하는 것은 아닐까?
평화를 위하여 땅을(Land for peace)!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자기 민족의 역사와 조상의 얼이 담긴 땅을 상대방에게
양보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그 땅에 애착과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지하드나, 정통유태교의 영토주의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공존공영이 어렵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잘 살기 위한 밑그림을 가지고 협상의 테이블 앞에 앉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