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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片紙 IX - ‘풍요로운 음악을 위하여’

성서와문화 2009.12.28 16:02 조회 수 : 1214

 
[ 작성자 : 김순배 - 음악 ]

21세기의 촉망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들 중 하나인 엘렝 그뤼모(Helen Grimoud)의 눈빛은 유난히 형형합니다. 소리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탐미적 기질의 프랑스인 답지 않게 진중한 정신의 뼈대가 견고한 브람스나 베토벤, 슈만 등의 곡에서 발군의 연주정신을 보여주는 그녀는 여가시간을 ‘늑대와 함께’ 보냅니다. 뉴욕의 작은 아파트 방에서 그랜드도 아닌 업라이트(*보통의 작은 피아노)로 연습할 만큼 소박한 그녀는 그러나 광활한 시골의 들판에 자신만의 ‘늑대 농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연주 스케줄 사이 틈만 나면 그 곳으로 달려가 늑대들과 함께 딩굴며 놉니다. 사철 길들여지지 않는 생생한 기상, 자연과 친화하는 본능적인 건강함이 그녀가 늑대에게 매료된 이유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주는 기존의 해석에 물들지 않은 야성적 순발력으로 팽팽하고 곳곳에서 풍성한 산소가 뿜어져 나오는 무공해 삼림(森林)처럼 신선합니다.
어느 해 가을 서울에 오신 저의 스승 존 아담스(John Adams)교수는 매스터 클라스 틈틈이 두꺼운 책을 펼쳐 읽곤 하셨습니다. 그것은 중후한 독일문학의 정수(精髓)인 토마스 만(Thomas Mann)의 ‘魔의 산’에 다름 아니었고 선생은 그 책 뿐 아니라 여러 권의 서적들을 짐 속에 넣어 오셨었지요. 그것으로도 모자라 서울거리를 걸어 대형 서점들을 순례하시며 ‘펭귄 문고’가 모 서점에서 단 돈 3000원에 팔리더라는 ‘정보’까지도 전해 주셨습니다. 또한 은퇴 이후를 몹시 기다리시는데 그 이유는 촬스 디킨스의 소설들을 비롯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들을 옆에 쌓아 놓고 실컷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랍니다. 최근에 드뷔시와 뿔랑의 피아노 곡들을 모은 음반을 발매한 선생의 진짜 취미는 ‘옛 미술품 감상과 모으기’이지만 이제는 아예 손수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십니다. 덕택에 선생께서 그리신 은은한 백합꽃의 파스텔화가 제 방에서 향기를 뿜고 있지요. 선생의 연주와 강의에는 문학과 미술에의 애정과 조예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캐롤 몬파커(Carol Montparker)의 글발은 날카롭습니다. 음악계와 연주현실에 대한 뼈있는 의견과 비평들은 그녀가 편집고문으로 있는 피아노 저널 ‘클라비어(Clavier)'를 영양가 있는 잡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일년에 수십 회의 연주회를 소화해 내는 중견 연주가이기도 하지요. 한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과 가진 그녀의 인터뷰는 단순한 대화를 넘어서 심층을 파고드는 예리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통찰력과 포용력을 두루 갖춘 전방위적 음악인으로 만들었는지는 그녀의 에세이집 ’피아니스트의 풍경(A pianist's landscape)'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피아노가 있는 아름답고 편안한 실내를 그린 표지화는 자신이 직접 그렸습니다. 그리고 책 사이사이 들어있는 삽화들도 이미 수채화에서 일가를 이룬 그녀의 솜씨입니다. 독서광이기도 한 그녀의 또 다른 취미는 ‘정원 가꾸기’인데 유일한 고민은 정원을 가꾸다가 학생을 레슨 해야 할 때 ‘정원사’에서 ‘선생’으로의 역할 전환이지만 사실 두 영역사이에는 닮은 점도 많다고 토로합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쉔베르그나 거쉬인등도 빼어난 화가였습니다. 유명한 칠레 태생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박물관을 차릴 만큼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의 민속 미술품을 수집하고 연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옛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음대 캠퍼스는 미술대학과 인접해 있던 터라 자주 미대 실습실에도 놀러 가고 조소과 학생들의 야외 작업장 구경도 가곤 했었습니다. 밤샘 작업을 예사로 하던 그들은 항상 남루한(?) 옷차림이었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지냈지만 틈틈이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즐겼습니다. 물론 미대 친구들은 책도 많이 읽었고 음악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나 모험심 혹은 단순한 치기(稚氣)로 말하더라도 당시의 제 눈에는 음대생들의 그것보다 한결 멋지고 성숙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었겠으나 상대적으로 음악외적 지식과 소양에 있어서 무관심하고 열등하기까지 한 듯한 음대생들의 모습이 저 자신을 포함하여 부끄러웠었지요. 미대 친구들의 자유로운 태도를 보며 좁은 연습실에 갇혀 자신의 악기하고만 씨름해야 하는 음대생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말합니다. ‘시인이나 화가는 밤새 술을 마시며 벌판에 딩굴 수 있지만 음악가, 특히 연주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진 않았어도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빠리 유학 시절 사진 작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음악인의 길을 갈 것인지를 놓고 처절하게 고민하며 쎄느 강의 다리를 수십 번도 더 왔다갔다하는 방황을 오래 계속했다고 합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 실기위주의 컨서버토리가 처음 생길 때의 개교 취지가 제 가슴 속에 마치 생선가시처럼 걸려 있습니다. 대학 1,2학년 때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에 대한 부담을 없애고 순수 실기 훈련에만 진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음악교육의 장이 열렸다는 말이었지요. 물론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그것이 축복인지 족쇄인지는 아마도 경험자들이 더 잘 파악해 갈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정당하고 진지한 성찰 그리고 세계 전반과 인접예술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 없이 끌고 나가는 음악적 내면은 오래지 않아 자기모순의 황폐한 결론에 다다르기 쉬움을 자주 목도하는 현실입니다.
지난 두 해 한적한 미국의 남부 도시에 머물며 얻은 소득 중의 하나는 바로 잊혀졌던 자연현상의 재발견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구름이나 처음 대하듯 변화무쌍한 노을 또는 밤의 호수에 잠겨 있던 놀랍게 크고 밝은 달 같은 것들. 비정한 서울의 삶이 용인하지 않았거나 보았더라도 감당할 여력이 없어 짐짓 외면했던 숨겨진 자연을 실물 크기로 접하는 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탄성뿐이었다니까요. 너그러운 자연의 재충전 세례를 받고 돌아온 서울에서 저는 공방을 찾아 오래 전부터 별러왔던 도예에의 입문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왠 걸요, 손 물레를 끝없이 돌려야 하는 작업은 손을 써야하는 직업의 제게 치명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고 지금 저는 망설이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 시작부터 장애물에 부딪힌 셈이지요.
사람이 음악을 위해 존재한다기보다는 분명 음악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일 터입니다. 우리가 왜 음악을 하는지 고민하는 음악인, 음악도들을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한편 음악외적 분야에도 시선과 관심을 나눌 수 있는 정신이 그립습니다. 문학과 미술과 그리고 결국 ‘삶의 기미(機微)’를 아는 향기 나는 음악인들을 많이 보고 싶습니다. 늑대와 함께 추는 춤이, 고 미술품에 대한 안목이, 고전 문학작품들에 대한 깊은 조예가, 시각적인 세계가 주는 상상력에의 심취가 결국은 우리 음악 하는 이들의 내면세계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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