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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과 물 - 엔도 슈사꾸의 『깊은 강』에 대하여

성서와문화 2009.12.28 16:02 조회 수 : 1368

 
[ 작성자 : 김승철 - 일본 金城學院大學교수 ]

가톨릭 작가로서의 엔도에게 있어서 필생의 문제는,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기독교를 일본이라고 하는 풍토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작가의 문제」, 「신들과 신」, 그리고 「호리 다쯔오론 각서」등, 이른바 초기의 평론 삼부작에도, 위와 같은 엔도의 문제의식이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엔도에게 있어서 「일본이라고 하는 풍토」란 어떠한 것이었는가? 엔도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썼던 「생일 밤의 회상」이라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적 감성이란, 범신적 풍토 전통을 모태로 하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범신성(凡神性)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일체의 능동적 자세를 잃어버리고 있다. 둘째로 그것이 동경하는 바는 오직 흡수되어지는 일이다.
「수동성」과 「흡수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특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일본적 - 아시아적 - 범신성은, 전체로서의 신과 개체로서의 인간을 대립시키면서 「존재의 질서」를 강조하는 「일신성(一神性)」과는 다른 정신적 세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범신성이라고 하는 풍토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은 자연에 대한 여하한 투쟁, 여하한 거리감도 거치지 않은 채 자연에, 혹은 신들에게, 우주에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생일 밤의 회상」)
일체의 「대립」과 「대비」를 거부하는 일본적 범신성에 있어서는 「대개의 것이 희미하게, 혹은 회색으로 아물거리는 봄비나 한차례 비 온 후의 습윤한 풍경」속에서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봄비나 한 차례 비 온 후의 습윤한 풍경」이 그려내는 「범신적인 미학」(「전통과 종교」)은 이후 엔도의 문학에 있어서 가장 즐겨 등장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봄비나 한 차례 비 온 후의 습윤한 풍경」이라는 액체성의 분위기는, 일본적 영성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엔도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액체성을 본질로 하는 범신성은 서양의 기독교도 액체적인 것으로 변용시켜버리며, 이로써 두 세계는 융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도, 모든 액체의 본질이 그러하듯이, 일본이라고 하는 범신성의 풍토 속에 녹아들어가 모습을 잃어버림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고백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죽음과 재생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기독교 내적 논리는, 일본이라고 하는 풍토와 기독교의 만남에 있어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엔도 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분기점으로 평가되는 「바다와 독약」에도, 앞서 말하였던 액체성의 제목이 붙어있다. 「바다」란 생체해부를 자행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신 없는 일본인의 정신풍토」를 의미하는 메타포임과 동시에, 일신적인 종교와는 다른 범신적 종교의 구원의 논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히로이시의 해석 중에서도, 앞서 인용하였던 엔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조용한 바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범신적인 일본이라는 풍토가 아닐까.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생각되는 바다야말로 자연 속에 넣어 용해하고자 하는 일본인의 정신풍토를 상징하는 바에 상응하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자연과 순응하여서 신들의 세계에 안주하고,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려 하지 않는 일본인의 삶의 방식을 상징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 독약이라는 말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악 그 자체이다. 그것은 「그만두려고 한다면 그만 두라」고 했지만 생체해부에 응하고 말았던 신 없는 일본인의 정신풍토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언제든지 독약을 자신 안으로 집어넣어 용해시켜 버린다.
그리고 엔도 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총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침묵』 속에서도 엔도는 일본을 「늪지대」에 비유하고 있다. 후미에를 밟음으로서 배교한 신부에게 「신부는 …이 일본이라고 하는 늪지대에 패한 것이요」라는 태수의 지적대로, 「늪지대」란 기독교가 「일본이라는 풍토」속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좁은 문이었다.
이렇게 「봄비」로부터 「바다」를 거쳐 「늪지대」에 이르기까지의 엔도의 혼의 여정은, 마침내 「어머니 되시는 분의 이미지를 의탁한 강」(「갠지스 강과 유대 황야」)으로서의 「깊은 강」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엔도가 희구해 온 「어머니 되시는 분」으로서의 신의 모습도 조형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도 거론하였다시피, 엔도의 작품과 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그의 「내부의 세계의 소식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 이것은 사소설(私小說)로서의 엔도의 작품이 지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 『깊은 강』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물」과 관련된 이름이 붙어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엔도 자신의 실존적인 신앙과 생의 여러 단계가 「물과의 관련하에서 읽혀지고, 결국은 보다 커다란 「물」을 의미하는 갠지스 강에 합류함으로서 아시아적 범신성을 통해서 「세례」를 경험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 강에 들어오면, 지금까지의 모든 죄가 흘러가 버리고, 다음 세계에서는 좋은 상태로 태어날 수 있다고 힌두교도들은 믿고 있습니다.」는 말대로, 「깊은 강」은 옛 것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재생의 강인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이라고 하는 서양의 종교로부터 「비자발적으로」받았던 「물」세례로부터 탈각해서, 아시아적 영성이라고 하는 「강」에서 재 세례를 받는 행위이다. 처음에 받았던 세례를 통해서 엔도는 자신의 머리에 부어진 물이 가져다주는 비적(秘蹟)이 주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의 「세례」를 통해서 엔도의 신앙은 그의 목숨을 흐르는 범심적 영성이라고 하는 강에 몸을 담금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강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후미에를 밟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형식만의 것은 아니었다. (『침묵』) 엔도가 비운의 기리시단의 사무라이의 입을 빌려서 고백하고 있듯이, 「어떤 형태로든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는 그의 의지를 초월해서 비적의 힘이 작용한다.」(『사무라이』) 그렇다고 한다면,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자에게도 「그의 의지를 초월해서 비적의 힘이 작용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아시아적 영성을 의미하는 갠지스 강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빈 「형식」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종교이고, 또 하나의 계시이며, 또 하나의 은총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의 강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은혜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행위이다.
「강 속으로 한 발을 넣고 다른 발도 담갔다」는 것은, 실로 엔도 자신의 신앙의 역정이기도 하였다. 엔도는 『침묵』을 통해서 일본이라는 「늪지대」에 「한 발을 넣음」으로서, 서양적 기독교로부터의 일탈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머지 한 발은 여전히 「강」밖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비록 기독교가 「어머니 되시는 분」으로서 형상화되었다고는 하여도, 그 그리스도는 여전히 객체로서 남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제 엔도는 갠지스 강에 「다른 발도 담갔다」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존재는 그 이름마저 탈각해서 무명의 존재로서 -「양파」로서 - 다시 태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강』은 엔도가 태어나 자라난, 그리고 다시금 그리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으로의 「歸去來辭」였다. 엔도가 「어머니 되시는 분」이라는 단편에서 희구하였다시피, 그것은 서양의 기독교로부터 아시아의 종교에로 「개종」한 엔도가 돌아갈 구원(久遠)의 「어머니 되시는 분」의 품이었고, 영원한 생명이 흐르는 은혜의 강이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신비는, 단지 성찬론의 문제만이 아닐, 기독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테마이다. 이 주제에는 철학과 신학, 이성과 계시, 문학과 종교(=기독교), 그리고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포도주로 변한 물」(요한복은 2:9)의 신비와 「포도주에 물이 섞여있다.」(이사야 1:22)라는 경고에 덧붙여서, 엔도의 작품에 등장하는 「물」의 상징은 신학적으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엔도가 거쳐 왔던 신학적 과정, 즉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로부터 이름이 없는 그리도, 아니 많은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에로의 전환의 배경에는 종교다원주의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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