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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타 파울에 대한 추억

성서와문화 2009.12.28 15:58 조회 수 : 1222

 
[ 작성자 : 긴윤옥 - 여성신학 ]

2000년 가을은 나에게 무척 부담스럽던 계절이었다. 전쟁 시 성폭력에 대한 ‘불 처벌‘의 흐름을 단절시킬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 제 법정」이라는 시민법정을 꾸려 성사시켜야 할 책임 때문이었다. 그 책임에서 제일 부담스럽던 일이 40만 불의 경비 중에서 한국이 담당한 10만 불을 만들어야 할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12월로 ‘법정’ 개정일이 닥친 그 해 가을에 나는 국내 모금의 한계를 절감하며 독일로 ‘여성국 제 법정’ 홍보 겸 모금을 위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베를린, 푸랑크프르트, 함부르크 등 7개 도시를 돌며 심포지엄이나 설명회나 인터뷰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와 ‘법정’을 홍보하면서 나는 3주 동안 독일국내 여행을 했다. 이 독일여행의 과정에서 나는 많은 독일여성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나에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이 크리스타 파울과의 만남이었다.
모임이 끝난 후 이야기하자는 크리스타를 따라 간 곳은 문 닫은 대형 쇼핑센터들이 즐비한 큰길가 카페다. 9월의 날씨는 아직도 밖의 테이블에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건너편 닫힌 문 앞에서는 백발의 노인이 바이어린으로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피곤과 낭만으로 기분 좋은 저녁시간의 분위기를 즐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크리스타는 기막힌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만 스폿트 라이트를 대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무대 전체의 조명을 켜댄 느낌이었다. 크리스타는 1989년부터 캇셀의 연구자 구릅이 조사를 해오던 「나치시대 강제수용소 안의 위안소제도」문제를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리스타는 말머리에서 자기가 이 조사를 시작했을 때에 한국여성단체가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군이 조직한 강제 매춘의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음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더욱 더 강하게 숨이 길게 역할을 하는데 대해 경탄하고 있다고도 했다. 캇셀에서 사회교육학을 공부한 후, 함부르크에서 여성영화 자료실 일을 10여년 하다가 지금은 이 연구결과로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라는 크리스타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 가난과 불행의 삶에서 매춘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침묵과 슬픔을 대변하는 일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칠 생각인 것 같았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나치시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는 1940년부터 42년에 걸쳐 약 3만5천명의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료관이나 아우슈비츠와 같은 개별 강제수용소 자료의 조사, 보고나 회상의 검토나 조사, 그리고 희생자인 여성들의 인터뷰에서 얻은 결과이다. 이 여성들은 6개월마다 교체되었고 그리고 그 여성들의 대부분은 그 후에 살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크리스타가 조사한 42년 이후 해방까지는 이 숫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라벤스브뤼크 여성강제수용소에서 선발된 매춘용 여성들이었고 동유럽이나 유대인 여성들이 비교적 많았다고 한다.
라벤스브뤼크 여성강제수용소는 베를린 시 북쪽에 있던 독일의 유일한 여성수용소이다. 1939년 개설 이후 1945년까지의 수용자 수는 13만 명을 넘었으며 초기에는 ‘비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체포된 여성들이 많았으나 1941년 이후에는 외국인 여성이 더 많았다. 이들은 구내에서의 섬유, 피혁가공 제조의 노동을 강요당하다가 42년 이후에는 수용소 인근에 세운 시멘트 공장의 군수 생산노동에 동원되었다. 그 뿐 아니라 42년부터 43년에 걸쳐 전쟁에서의 부상을 치료할 약품을 위한 인체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주로 폴란드 여성을 썼고, X선을 사용한 불임조치는 노인이나 병자나 유대인 여성들의 멸절을 위해서 선별하여 실시되었다. 1945년 초에만 해도 멸절을 위해서 5천 내지는 6천명의 여성들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안의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비사회적’이라는 것은 나치의 「독일의 피와 독일의 명예의 보호를 위한 법률」에 위반한 것을 의미한다. 이 법에 의하여 독일인 여성은 성적생활 여하에 따라 체포되고 감금되었는데 주로 가난하여 매춘부로 일하던 여성들이나 외국인 남성과 교제하는 여성이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성적행동은 강제 불임수술을 할지 여부의 판단 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타는 분노를 깊이 간직한 어조로 나치의 모랄의 이중성을 설명했다. 나치는 한편에서는 매춘을 단죄하면서 매춘과 독일의 순결한 주부와 어머니를 대치해 놓고는 다른 한편에서는 매춘을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촉진했던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기를 높이기 위해서, 또는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이 양호한 노동성적을 올리며 군수산업이라는 고역을 인내해 내기 위한 장려책으로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선물로 소위 ‘비사회적’인 여자들을 던졌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 왕의 선물로서 일본군 병사들의 투쟁 의욕을 높이기 위한 위로품이었고 군의관에 의한 불임수술이나 관리를 받아왔던 것과 같았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우리 ‘위안부’할머니들이 종전 이후 50년을 침묵으로 지냈듯이 살아남은 여성들은 침묵해 왔다. 종전 후 독일이 유대인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즘의 역사적 사실을 회개하며 보상해 나가는 작업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나 나치시대의 독일여성들에게 행했던 성폭력을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타부로 되어있다고 한다.
크리스타는 이 여성들이 우리 ‘위안부’할머니들처럼 고발의 소리를 내지 않은 이유를 아마도 성폭력을 저질은 이들이 ‘자기나라 남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개 소위 ‘비사회적’인 존재, 행실이 나쁜 여성들이라는 각인이 찍힌 여성들이었음으로 자기 자신들도 그 가치를 내면화하여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전후 독일에서는 이 여성들을 나치즘의 희생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여론만이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그랬다. 이러한 법조계의 자세는 서독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어 80년대에 와서야 변했다고 한다.
사실 2차대전 이후의 뉘른베르그 재판이나 도쿄 극동 군사재판에서는 분명히 서류상으로 성폭력의 사실이 드러나 있었는데도 법조계는 이것을 전쟁범죄로 취급하지 않았다. 전쟁시 성폭력이 전쟁범죄로, 인도에 반하는 죄로 인지되어 처벌받게 된 것은 유고와 르완다의 군사법정 이후부터인 것이다.
2000년 12월 10일, 여성국 제 법정이 드디어 도쿄에서 일본 우익들의 고함소리에 포위당한 체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틀째인가 내가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누가 소매를 잡아 당겨서 돌아다보니 크리스타 파울이었다. 독일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다시 회장 지하에 있는 우동집에 마주앉아서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도쿄 법정이 끝나면 오사카의 「여성. 전쟁. 인권 학회」의 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한다고 했다.
크리스타는 나에게 ‘여성국 제 법정’을 마치고는 어떤 계획이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으로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는 대로 그 판결을 실행으로 옮기는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크리스타는 조금 주저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한국 남자들이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에서 성폭행을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누가 일을 하는거지요? 한국 전쟁시의 국제조사단의 보고서를 읽어 보았는데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성폭행 사례가 이미 조사되어 있었어요. 한국은 피해자이지만 다른 한편 가해자이기도 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안고 가야겠지요? 그렇게 하리라고 믿어요.”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기가 막히게 버거워서 알면서도 우리가 피해왔던 그 문제를 막상 크리스타 파울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가책을 받은 것이다. 입수한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전쟁 시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성폭력을 당하며 가족이 목전에서 학살당하는 것을 경험한 여성들이 다대한 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이 경험을 안고 침묵하며 트라우마를 앓으며 평생을 살아 왔을 것이다. 독일의 피해자 여성들처럼.............
크리스타 파울에 대한 추억은 나에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기의 삶을 살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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