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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과 이상화

성서와문화 2009.12.28 15:57 조회 수 : 1354

 
[ 작성자 : 윤장근 - 죽순문학회 회장 ]

근대 문인 중 대구에서 가장 먼저 문학 활동을 한 사람은 현진건(玄鎭楗)이다.
1900년 계산동 뽕나무 골목에서 현경운(玄炅運)의 4남으로 태어난 후 곧 수동으로 옮겨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 본관이 연주인 부친 현경운은 본시 서울 사람으로 구한말 통신 업무를 관장하는 전보총사(電報總司) 주사직과 의정부 중추원외랑(中樞院外廊)을 거쳐 대구로 내려와 대구 관찰부 주사로 있다 정삼품(正三品) 관직인 대구전보사장(大邱電報司長)을 역임한 후 그대로 눌러 앉아 샘 밖 골목에 야간 노동학교를 개설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은 덕망가였다.


빙허(憑虛)와 관련된 글에서 곧 잘 부친이 대구 우체국장을 지낸 것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대구 우체국 직제를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 대구 우체국은 일본인이 1906년 역 앞에 청사를 신축(토정동 건물은 1911년 건립)하면서 구한국의 우체사와 전보사를 통합하여 만든 것으로 체신 사무관인 우체국장은 일본인이 맡아했다.
부친이 세운 노동학교를 다닌 현진건은 15세 나던 해 대구 부호 이길우(李吉雨)의 장녀인 두 살 연상의 이순득을 맞아 수정(現 인교동)에서 2년간의 신혼생활을 보내고는 당숙 현보운 가에 입양하기 위해 1917년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선대가 서울에 살았고, 빙허 역시 서울로 이주해 간 사실을 들어 대구인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빙허야말로 대구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대구 말을 썼고 대구의 규수를 맞아들인 토박이 대구인이 아닐 수 없다.
현진건은 1920년 백조동인이 되면서 단편 <희생화>를 발표한 이래 43세로 작고할 때까지 단편 30여편과 구상 웅대한 “무영탑”등 장편 3편을 남겼을 뿐이지만 문학의 선구자로서는 물론 단편소설의 개척자로서 이지적(理智的) 객관묘사로 사실주의(寫實主義) 문학의 기반을 확립한 작가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당시의 대다수의 작가들이 무엇을 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어떻게 쓸 것인가에 더 고심한 현진건의 만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1936년 베르린 올림픽 일장기 말소사건에 따른 동아일보사 사회부장직 사직과 장편 <흑치상지>의 강제 중단, 미곡 중계업인 미두(米豆)의 실패 등 비분의 나날을 음주로 달래다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1943년 4월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파란의 세월을 마쳤다.
관동 대지진시 헌병대에 끌려가 참살 당한 이또노예(伊藤野枝)의 첫 남편이었던 일본의 유명한 다다이스트 시인 쓰지쥰(潤)이 왔을 때 그와 선술집 순례에 나서 서울역에서 동대문까지 가는 사이 쓰지쥰 40사발, 빙허 60사발의 술을 마셨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또 동아일보 신년 교례회에서 술에 만취하여 사장 송진우의 뺨을 서슴없이 때렸다는 빙허.
생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과천에 뿌려짐으로써 빙허(憑虛)라는 아호 그대로 허공에 떠 바람을 타고 완전한 공허로 돌아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이상화(李商和) 그는 어디에 있던지 고향땅 대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서울을 비롯 일본 중국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늘 대구의 뜨거운 하늘이 이글거렸다. 최근 어디를 가도 상화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가 해준 것은 너무도 미미하다. 동상을 세운 것도, 고택을 보존한다고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요즘 와서의 일이다.
상화의 시작 활동은 1922년 첫 작품 <말세의 희탄>을 백조에 발표하면서부터 1941년 <서러운 해조>를 쓰기까지 19년간이랄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28년까지의 7년간에 불과하다. 이 7년이라는 기간 중 개척기의 시인들이 하나같이 감상과 퇴폐주의에 빠져있을 때 상화는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가상>, <시인에게>, <통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시를 통해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을 가장 절실한 조국의 언어로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그는 시인의 사명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생의 삶은 충동의 연속이며, 충동은 곧 생활 그 자체이다. 시인은 이 생활을 기록하는데 남다른 책임을 가져야 하며 그 책임은 곧 민족 언어를 지키는 일” (문단 측면관)로 믿었던 것이다. 상화가 이렇듯 민족주의자로서의 철저한 신념을 가진 데는 우현 학숙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923년 9월에 있은 관동 대지진의 참상을 체험한데 기인한다. 관동 일대가 삽시에 잿더미로 화한 속에서 난데없는 조선인 폭동설이 나돌아 수많은 한국인이 목숨을 잃는 그 참혹한 현장에 상화는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난무했던 유언비어가 얼마나 허황했던가는 우물에 넣었다는 독약을 조사해보니 고춧가루였었다던가, 또 개천에 버려진 한국여인의 음부에 죽창이 꽂혀 있는 것을 목격, 너무나 끔찍해서 몸을 떨었다는 일본인의 증언으로도 그 참상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살육의 현장에서 인간의 잔혹함, 덧없음, 망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허무를 느꼈다는 것은 뒷날의 애기지만 한 순간에 파괴된 물질과 인간존재의 황량함 - 폐허로 변한 시가지를, 학살당한 한국인의 시신 앞에서 본 것은 소리내며 무너지고 있는 민족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극단의 표현을 하자면 상화의 내면은 이 때 불변의 것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1923년 3월 일년 과정의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한 뒤 프랑스로 가려던 계획도, 정상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려던 꿈도 다 사라지고 다만 절망적인 분노만이 타올랐을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황폐의 지향점은 이미 저항과 술일 수밖에 없었다.
상화는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으면서 독립기금 모금을 위한 이른바 <ㄱ 당사건>에 뛰어들었고, 36년에는 백씨 이상정을 찾아 중국으로 간 것으로 해서 또 다시 곤욕을 치르고는 음주 행각이 더 심해져 가산마저 기울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성권번의 소옥과의 동거설이 나돈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상화의 음주를 두고 퇴폐적 낭만주의자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핏기 없는 염세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직업적 혁명가도 아니었다. 생의 허탈감에 번뇌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은 한 사람의 민족시인이었을 뿐이다. 괴로워하면서도 너그러웠던 그는 시란 자기 존재의 증명이며, 영원으로 가는 행위임을 믿는 사람이었다. 39년 상화는 몸담고 있던 교남학교에서도 물러나 문학에 열중했으나 이미 병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가 있었다.
1943년 2월 만주로 떠나면서 백기만은 상화를 찾았다. ‘그는 벌써 알아 볼 수 없도록 야윈 얼굴로 집필하려던 국문학사를 탈고해 놓고 죽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틀린 모양이지....’ 하며 힘없이 웃더라는 것이다. 백기만의 눈에 비친 상화의 모습은 이미 상화가 아니라 참담한 형해 그 것이었다. 육신을 남김없이 혹사한 그 처연한 모습은 상화의 험난한 생애를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죽음 얼마 전 그는 마지막 진단을 받고자 서울로 갔다. 남대문통 삼통여관에 묵으면서 위암진단을 받았다. 통증을 견디지 못해 두 손으로 가슴팍을 긁어 옷이 피투성인데도 모친이 상경하자 피 묻은 흔적을 가리고 마주 앉았다는 것이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두발을 괴고섰다.
허나 그것은 헛일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가고 오지 않았다.” <몽환병>

 

상화는 이렇게 갔다. 생전 시집도 한권 남기지 못한 체였다. 유고가 많이 있었으나 교남학교 제자인 이문기가 출판을 위해 임화(林和)에게 을유문화사의 출판광고까지 나왔던 것이 두 사람 다 월북하는 바람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가족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그것 또한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다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써 놓은 60여 편의 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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