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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지향적 교회

성서와문화 2009.12.28 15:55 조회 수 : 1209

 
[ 작성자 : 정권모 - 기장 신학연구소 ·신학 ]

경제검찰로 통하는 권력층의 한 인사가 약점이 있는 어느 재벌기업에 10억원대의 큰돈을 사찰 복지시설 건축을 위한 시주(施主)금으로 기부하도록 외압을 넣었다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관련 고위층 인사를 검찰이 기소한 상태이니 진위여부는 사법부의 최종판결이 있기까지 가타부타 속단할 일은 아니다. “강요에 의한 시주”는 범죄라는 것이 검찰 측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불교계의 반응이다. 회색 빛 장삼(長衫)을 입은 승려들이 검찰청사로 몰려가 “불교를 왜곡, 탄압하는 검사는 물러나고 검찰은 사과하라.”는 등의 현수막을 들고 항의 시위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곧 이어 “시주금을 뇌물로 둔갑시켜 불교를 음해하는 검찰을 규탄 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중요사찰에 내어 걸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삭발한 머리들에서 종교적 광란의 여진(餘震)을 보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이 어찌 나 하나 만이었겠는가? “승려들은 수양에만 전념할 것이지 잿밥에 눈을 돌리지 말라”는 등의 네티즌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항의에 동조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이 문제를 주목하는 것은 정치권력에 편승한 종교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게 보이는지를 지적하려 함이다.

 

“그 때 이미 넌 황제의 검을 손에 잡을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 최후의 선물을 물리쳤느냐? 그때 그 위력 있는 악마의 세 번째 권고,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 3:9)를 받아들였다면, 너는 지상의 인류가 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I권 ‘대 심판관’ 편에 나오는 내용의 한 토막이다. 물론 역사적 예수의 시험 사건을 패러디(parody)한 이야기다.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고 그들의 빵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인간을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악마에게 절하고, 천하를 얻는 것을 거부한 예수에 대해 교회가 불평하는 이유이다.
‘빈대 맛’을 본 교회는 내친김에 또 이렇게 내 뱉는다: “우리는 황제의 칼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잡은 이상 물론 너를 버리고 그(악마)를 따른다.” 교회의 제자직 수행은 권력 지향적 교회와는 이토록 무관하다는 참으로 참혹한 사실을 옛 러시아의 문호는 진작 간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권력에의 욕망”은 “더러운 물질적 행복의 추구”라고 탄핵한다. 자신들의 맹주(盟主)가 거절한 그 권력을 지향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교회”라고 절규한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사탄의 마지막 제안은 “예수 시험의 절정”에 이른다.(E.Schweizer)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세속적 권력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계 지배권”을 장악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역사적 예수는 악령과 충돌한 것이다.
이에 대한 화가 렘브란트의 시각은 가히 예언자적이다. 예수님의 시험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보면, 절하면 권력을 주겠다고 충동질하는 사탄의 모습은 사탄=죽음의 세력으로 보는 중세의 방식 그대로이다. 렘브란트의 사탄은 날개를 달고 있다. 그러나 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부릅뜬 눈, 예리한 손톱에 공격용 꼬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밑으로 처진 꼬리가 보여주듯이 무력하기 그지없다. 으르렁대는 허세가 일단 험악해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별것 아니라는 분위기가 완연하다. 결국, 사탄은 천적인 존재인 듯이 행세하지만 땅에서 노는 속물 이상이 아니라고 이 작품은 암시하고 있다.
악마의 거듭된 유혹에 대한 주님의 모습은 유혹하는 악마와의 상종(相從)을 철두철미 거부하는 자세이다. 요지부동 등을 돌리고 있다. 꼬드기는 사탄을 거들떠보시지 않는다. 바른손은 주님의 가슴 위에, 왼손은 주님의 머리에 얹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가슴)과 뜻(머리)을 다하여 그 분만 예배하고 섬겨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사탄아 물러가라는 렘브란트 식의 메시지를 듣는다.

 

인간 형제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주일예배에서와 똑같이 세상영역에서도 정치-사회적으로 증언되고 입증되어야 한다. 시대가 요청하는 “정치적 결단”은 인간을 위한 봉사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봉사, “정치적 예배”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 몇 가지 함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1)새로운 이념이나 체제에 대항하다가 낡은 질서에 고착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반동이다. 2)잘못된 중립성을 지킨답시고 양비론적-기회주의적 방식으로 비정치적 내면의 영역으로 퇴각할 수 있다. 오늘의 니고데모이다. 3)참여하다가 새롭다고 여기는 이념이나 질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K.Barth). 그리고 거기에 충성한다며 목숨을 건다. 영락없는 종교적 시정배(市井輩), 속물이 된다. “신학적 광란”(Ph.Melanchthon)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조직신학계의 원로 이종성 박사는 최근 우리 교계, 신학계를 진단하면서 복음을 정통주의나 근본주의로 포장해 버리는 어리석음, 복음을 인간적 경험으로 희석시키는 미련함에 앞서서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경향”을 매우 심각한 교회와 신학의 타락이라 경고하고 나섰다.
오늘의 신학적 정치윤리의 위기는 교회의 정체성 문제이다. 참여라는 구실 아래오직 그분에게 드려야 할 영광과 찬양을 정치적 실세에게 넘겨주고 있다는 경고가 중단 없이 제기 된지 오래이다. 이는 속성상 “히틀러 페스트”에 의한 “소름끼치는 일들”(L.Ragaz)에 침묵한 그때 그 시절 게르만 민족교회의 만행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의 수레를 끌겠다고 법석대다가 오히려 ‘하나님이 타고 계신 수레의 바퀴 밑에 깔려’ 있는 형국이다.(K.Barth) 이보다 더한 배신이 없다. 이는 신앙적 간음이다.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는 타협보다 훨씬 치사하고 간교하다.정치화한 교회의 흉측한 모습이다.
우리는 “강요된 시주”와 관련된 불교계의 추한 행태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에 못지않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이다. 은 30냥을 챙기겠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남용하는 크고 작은 정치적 시위는 우리 모두를 사정없이 슬프게 한다. 정치적 힘에 편승하려는 권력 지향적 종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내장을 흘리고 다닌다. 규모에 관계없이 예나 지금이나 교회와 권력 간의 유착(癒着)이 문제이다. 이 유착의 배후에는 불쾌하게도 어김없이 “경배하면 다 주겠다”는 유혹의 실마리가 있다.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교회의 개입 방식은 지난 긴 세월 동안의 치열한 실험 끝에 얻은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에게 바탕을 둔 행동”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룩하는 개혁”이다. 여기에서만 “실제적 인간해방”이 가능하다.
까닭에 “예수 안에서 신을 보는 기독교를 편협한 민족종교”라 하여 이를 폐기하자고 핏대를 올리는 야스퍼스(K.Jaspers)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도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기독교적 제국주의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편협성은 더욱 아니다.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말한다. 영원 후의 일이 아닌 시간 중의 구원을 의미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유일한 주라고 말하는 배타적 신앙고백은 “모든 새로운 바알과 가이사의 신성”에 대한 배타적 거부를 말함이다(J.M.Lochman).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의 재발견이 20세기 현대신학의 새 출발이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시각이 아니다.
인간해방을 위한 선교운동은 인간의 인간적 행동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신앙에 바탕을 둔 참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개입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애굽기 14:14) 정치-사회적 사안(事案)마다 덤벙대거나 대들 일이 아니다. 성급한 정치적 “핏대”가 얼마나 쉽게 역사의 반동으로 변질되는 지를 이 시대 오늘의 현장에서 수없이 보고 확인한 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지켜보며 정중하게 따르는 것”보다 더 급진적인 방도는 없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 되었지만 사흘 만에 무덤을 열고 일어나신 분을 주님으로 믿는 자만이 실제적 해방을 통해 영생할 수 있다.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한 3:16)는 사도적 방언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혁명적이다. 하나님의 혁명의 방식이다. 여기에 “절하면 주겠다”는 오늘의 악마적 유혹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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