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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無言)의 실천자, 그 험난한 예술가의 길

성서와문화 2009.12.28 15:54 조회 수 : 1278

 
[ 작성자 : 이남규 - 화가 ]

기술과 예술
화가가 된다는 것은 자연을 묘사하거나 색칠을 잘해서 서로 어울리게 꾸며 놓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기술자와 예술가는 어떻게 다른가.
기술은 취미가 있어 노력하고 되풀이하면 숙련되어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지만 예술은 그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술은 항상 인생과 더불어 성숙되고 인간 그 차체를 이해하고 그 자신을 완성해 나가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미술이란 인간의 영혼을 기록하는 언어이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조형언어라고 말한다. 화가란 이 조형언어를 통해서 인간 영혼의 상태를 표현한다.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서 그 작가의 영혼의 상태를 보기 때문이다. 화가는 그리는 작업을 통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 나간다. 마치 씨앗이 움트듯 시작된 그림은 점점 자라서 그 세계를 넓혀 나가고 마침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하늘과 땅을 뒤덮을 광활한 폭을 지니며 태초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의 소리를 받아 끝없는 미래를 향하는 노래를 읊게 된다.
그럴 때 화가는 환희를 맛보게 된다. 인생은 짧다. 오죽하면 초로의 인생이라 하였겠는가. 그러한 인간이 영혼을 동경하고 또한 희구한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통하여 화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영혼의 세계이다.
본래 인간은 작은 우주이다. 그렇지만 이 작은 분자는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그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은 무한하다.
인간이 달 표면을 걸어 다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얼마나 놀랐던가. 그것은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화가가 조형작업을 통하여 무한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며 과대한 망상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인생을 바쳐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문화를 낳는다.
도 닦는 일과 화업
화가라는 직업은 결코 밖에서 보는 것처럼 아름답거나 화려하거나 또는 편안한 동경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화업은 어떻게 그릴 것이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이 무엇이냐 하는 정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외롭고 쓸쓸하며, 자기 스스로를 다스려야하는 준엄한 길이다. 화가는 그리는 과정을 통하여 사물의 이치를 추구하며 깨달아 그 내적인 질서를 습득한다.
그것이 도 닦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 닦는 사람의 일념은 진리에 대한 사모(思慕)이다. 도 닦는 사람은 왜 사는냐, 왜 죽느냐,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 무엇이 헛된 것이며 무엇이 참된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전 생애를 걸고 수도한다. 화가의 경우도 그리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을 벗어나 속세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를 갖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탈속이라 한다. 그러므로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내가 세계적인 화가가 되겠다든가, 만인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겠다든가, 또는 그림을 그려서 부자가 되겠다든가 하는 따위의 속된 욕심에 목표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런 속된 생각을 버려야만 화도의 길에 들 것이다. 그런 속된 생각들은 스스로를 보다 천박하게 하고 해탈은커녕 자신을 망치는 결과만 불러오게 될 것이다.
유명한 스님이 되겠다고 중이 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스님이 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업도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비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다니고 세계적인 대학에 유학을 간다 해서 그 사람의 그림 세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진지한 자기 추구는 일류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비싼 물감이나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순리를 따라
요즘 큰 병폐의 하나는 저마다 너무 서두른다는 데 있다. 한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하루는 24시간을 기다려야만 지나간다. 겨울과 봄, 여름을 기다려야 가을이 온다는 것은 순리이다. 화업에도 예외가 없으며 절대로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초조해 한다. 그리고 필요 없는 데에 정열을 낭비한다. 이것은 세상을 혼탁하게 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
포도밭을 가꾸는 농부가 재촉한다고 때가 이르기 전에 포도가 익겠는가, 하긴 요즘은 비닐하우스라는 것이 있어 계절을 뒤바꿔 놓기는 했다. 그러나 화업에는 비닐하우스가 없다.
피카소가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천재적인 화가라고 하지만 그도 역시 그 나이에 알맞은 작품을 하였다.
다만 끈질기고 집요하게 다른 일에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직 화업에 종사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존경할 일이다.
그는 결코 나이를 초월하지 못하였고, 초월하려고도 안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서두름은 소위 출세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꽃은 소리 지르지 않고 쫓아다니지 않아도 나비가 날아든다. 기다리면 스스로 봉오리를 맺고 때가 이르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을 왜 서두른단 말인가.


쉬며 일하며 오히려 즐겁게 때를 기다리는 순리를 배운다면 화가가 되는 일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는 일과 같을 것이다. 공자님이 40에 불혹하였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화가가 하는 일
세상은 정말 바쁘게 돌아간다. 행길을 메운 사람과 질주하는 자동차들. 옆사람은 바라볼 사이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많은 바쁜 사람들이 가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물질이다.
한 때 정의를 부르짖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거리를 메우기도 하였다. 그 소리와 용기는 병들어 가는 세상을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물질이다. 이 물질주의는 이기주의를 낳는다. 이기주의는 정의라는 중심을 잃기 때문에 세상을 더 시끄럽고 무질서하고 혼탁한 것으로 만든다. 이기주의의 무덤은 향락주의이다. 향락주의는 세상을 더욱 병들게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주의를 없애고 본래의 순수한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을 무엇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것은 본래의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서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힘없고 연약해 보이나 그보다 힘 있고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미술은 그런 점에서 세상에 기여한다. 아름다운 예술은 어지러운 마음을 맑게 하고 포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욕정을 사랑으로 바꿔놓는다.
상처를 도려내듯 당장에 치유되지 않겠지만 온 세상이 아름다운 음악과 춤과 시와 미술로 가득 차고 사람들이 이를 즐기고 기뻐한다면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가는 진정한 화가이어야 한다. 화가마저 화업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는다면 화가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화가가 권위주의로 행세한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정말로 화가는 젖먹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탈속한 작품을 낳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를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화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는 지금의 젊은이다운 용기를 가질 때이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앞날이 약속되지 않는 험한 길을 걷기가 어찌 쉬운 일이랴. 그렇지만 젊음을 불사르고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으면 참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태어난 도 닦는 화가는 세상을 구원한다. 허영 된 욕망으로 화가를 지망한다면 그 욕망은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후에 크게 실망하고 사회에 유익한 것은 고사하고 사회를 더욱 부패시키는 찌꺼기가 될 것이다.
화가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대망을 가져야한다. 이기주의에 뿌리를 둔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겸손하며,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버리고 희생함으로써 근원에 도달하려는 도도한 대망을 가져야한다.
그러한 대망은 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묵묵히 조형을 통한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화가란 이러한 무언의 실천자이다. 이러한 생애는 언젠가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타고르는 예술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 하였고 톨스토이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였다. 각고의 쓰라린 노력만이 기다리는 화가가 되는 길이며, 가난하고 험난하지만 한번 해볼만한 가치 있는 길이다.

 

-이글은 이남규 화백의 작고 10주기 회고전을 위해 출판된 도록에 수록된 글로써, 부인 조후종 교수의 양해를 얻어 게재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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