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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片紙 VII - 혼돈 속의 비젼

성서와문화 2009.12.28 15:53 조회 수 : 1240

[ 작성자 : 김순배 - 전 한성신학대학 교수·음악 ]

‘앞으로의 음악사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요?’ 음악사 시험의 마지막 항목으로 자주 띄워보았던 질문입니다. 답은 ‘20세기 현대음악의 사조들이 더욱 극단으로 치달을 것’, ‘20세기 음악에 대한 반작용으로 옛 음악으로의 회귀운동이 일어날 것’ 혹은 ‘장르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정통 클래식스타일과 실험적인 경향들이 사이좋게 공존할 것’ 등등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나오더군요.

 

세계사 전반이나 인접예술들의 발전과정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역사도 기나긴 ‘진화의 여정’을 통과해 왔습니다. 기법 혹은 기교적인 측면에서도 그 점은 명백하지만 특히 음악적인 자의식의 부분에서 진화의 흔적은 뚜렷합니다. 그런데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즉각적이며 민감한 영역인 음악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떤 진보와 반작용의 변증법을 겪어냈는지 살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변화의 추이를 따라가다 보면 음악사란 ‘도전과 응전’의 반복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또한.

 

맨 처음 인성(人聲)으로부터 그리고 단선율로부터 출발하여 21세기의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음악사는 가능한 모든 변화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음악 상황은 좋게 말하면 다양성의 총화 아니면 혼돈의 전시장쯤 되는 것 같군요. 소위 퓨전 내지는 크로스 오버 양식들이 이처럼 현란한 모습으로 출몰한 적이 일찍이 없었지요. 그런 한편 흥미로운 사실은 21세기의 최첨단의 음악 사조들 중 발견하게 되는 ‘옛 음악으로 돌아가기’ 추세입니다. 바로크 음악이나 고전시대 음악이 갖는 정신치료학적 효용성 인식도 새삼스러운 옛 음악 돌아보기에 속하지만 현대의 악기와는 달랐던 당대의 악기를 사용하는 ‘원전연주’의 붐이나 고전시대 작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재현하는 연주형태들을 비롯 그 시대의 그 방식으로 해석하고 연주하는 경향은 이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든 외형적 편성이나 장치들의 옛 시대로의 회귀, 그 이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단지 현학적인 복고취미나 연주의 정체성 찾기를 넘어서서 해당 시대의 음악 정신 찾기에까지 그들의 관심은 접근해 있는 걸까요?

 

때때로 중세나 르네상스시대의 음악을 들으며 이 단순한 구조와 소리만으로도 음악의 에센스는 넘치도록 충족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합니다.어떤 이는 이를테면 음악으로의 입문은 오페라의 아리아로 하되 마무리는 실내악으로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내악이라면 온갖 번거로운 악기편성과 전개장치를 절제한 채 가장 정화된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는 음악장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한편 음악듣기의 시작을 화려하고 향기 진한 낭만주의 음악으로 했다면 그 완성은 바로크나 고전시대 음악으로 하게 되리라는 말도 가능할는지 모릅니다. 제 경우는 바로크도 역류하여 르네상스와 중세의 담백한 음악들에서 위로와 평온을 얻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음식쯤으로 비유하자면 온갖 종류의 양념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18, 19세기, 그리고 가능한 자극적인 재료와 요리법으로 무장한 20세기 음악에 피곤해질 때 무미건조 한듯하지만 재료자체의 맛이 담백하게 살아있는 옛 음악을 찾아가 보는 것이지요.

 

지난 편지들에서도 누차 밝혀드린 바 진정 우리의 정신에 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음악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혹은 바하의 경우에서처럼 한 때 잊혀졌으나 다시 되살아나는 음악에는 신비한 저력이 스며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저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을 떠올립니다.
모든 면에서 ‘암흑시대’였던 중세를 살았던, 특히 1500년 음악사를 통틀어 대 여섯명에 불과한 ‘공식적으로 기록된’ 여성 음악가들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존재. 어린 나이에 신심 깊은 부모에 의해 수도원에 ‘바쳐진’ 이후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영안을 지녀 하늘로부터의 계시를 끊임없이 내려 받았던 영적 신비주의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내면에 쌓인 계시와 깨달음을 아름다운 선율에 실어 수많은 찬트(chant)로 남긴 음악사의 보배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입니다. 그의 음악은 수세기 동안 묻혀있거나 무시된 채였었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죽었던 영혼이 부활하듯 재발견되기 시작합니다.여성이었지만 당시의 교회세력과 남성 우월주의를 그의 영적인 카리스마와 진정성으로 압도하며 중세의 남성권력을 침묵시켰다는 사실을 비롯 종교라는 미명하의 공식적 폭력이었던 십자군 전쟁을 극력 반대하고 비판했다는 점이나 당시 이미 부조리하고 모순투성이었던 교회권력이나 구조에 힘껏 저항했다는 점 등은 그의 시대를 초월한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음악을 신앙심을 표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음악이 없는 예배는 이미 예배로 성립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지요. 우리들 신심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경지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상태라고 볼 때 그 분이 인간에게 내린 값진 선물인 노래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예배의식에서 선택받지 않은 자들은 찬양을 할 길 없었던 당대의 관습을 힐데가르트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중세의 카톨릭에서 결코 허용될 수 없었던 여성들을 위한 그의 찬트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의 노래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지요. 12세기의 힐데가르트는 16세기의 마르틴 루터나20세기의 메시앙의 전신(前身)이었던 듯도 합니다.
그런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쓴 단선율의 무반주 음악이 21세기에는 신서사이저와 결합하거나 전위그룹에 의해 편곡되어 연주됩니다. 그가 쓴 예지의 시편들은 ‘’Vision’이라는 제목으로 21세기를 깨웁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가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이 첨단의 시도는 고음악 회귀 유행현상이나 다른 장르나 기법간의 크로스 오버 트랜드 일환의 성격이 강하긴 합니다. 모든 가능한 실험, 그리고 갈 데까지 간 음악경향들 끝의 색다른 시도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원래 씌여졌던 대로 신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고백을 담은 라틴어 가사는 온전히 유지되어 불립니다. 메시지를 담은 가사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힐데가르트의 ‘비젼’은 영혼을 일깨우는 단서를 숨긴 암호 같기만 합니다.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은 그것이 성가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힐데가르트의 ‘비젼’은 21세기의 혼돈 속에서 맑게 울려 퍼집니다.

 

이제 이 시대 이후의 음악이 가야할 곳은 어디일까요? 인간의 창의력과 실험정신을 지치도록 겪어 본 음악은 피곤합니다. 홀연히 부활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비젼의 시편들은 이 포스트 모던 시대를 밝히는 새로운 계시를 담은 투명한 예지의 언어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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