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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이 뜨여 보는 신앙에까지

성서와문화 2009.12.28 15:43 조회 수 : 1910

 
[ 작성자 : 김경재 - 한신대교수, 신학 ]

뜻과 말씀을 경청하는 종교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대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되는 비젼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장을 닫는 경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실현되어 가는 구원사적 과정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영원한 계약’의 실현과정이 됩니다. 그 중심에 흐르는 음악적 주악상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온누리에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선율이 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계약 당사자 간은 서로의 뜻에 귀기우려야 하며, 특히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하는 종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고, 사도들의 권면은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메시지 전달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란 하나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곳이라 규정할 만큼, ‘말씀을 듣는 일’이 핵심이 되어 ‘들음의 종교’로서 개신교는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귀로만 듣는 신앙을 넘어서
그런데, 20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지구 문명사는 거대한 털갈이를 하는 문명전환 단계로 들어갔습니다. 기독교 역시 자기 정체성을 ‘들음의 종교’로서만 이해한 것이 지나친 편향적 생각이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적 종교의 특징이 인격적 하나님 신앙을 그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려는 경건한 태도는 옳지만 기독교 신앙이 ‘들음의 종교’에로 경직화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기 42장 5-6절을 보면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럼으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 드리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본 자는 죽으리라는 거룩 신앙이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 온 유대적 신앙전통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파격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육안, 심안, 영안의 차별성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이 말씀은 당시 1세기 사람들이나 오늘 21세기 사람들에게도 쉽사리 이해되지 아니 합니다. 사람들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종교인에게는 3단계의 눈이 있다고 말합니다. 일컬어 육안, 심안, 영안이 그것입니다.
첫 단계는 육안으로 보려고 하고, 육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신앙단계입니다.
종교적 심성에는 기사 이적을 찾고 예언 방언을 찾는 바램이 있습니다. 큰 교회당과 보다 많은 회중이 모인 곳에 더 올바른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상식적 판단에 따르는 신앙생활 단계입니다. 성직자가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더 바른 기독교 복음 진리를 설파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헛된 기대입니다.
신앙이 한 단계 더 깊어지면, 심안이 열리는 단계입니다. 글자 그대로 ‘마음의 눈’이 열리는 단계이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 모습이나 통계 숫자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으로 말한다면 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개인적 사회적 책임에 더 투철하여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실천신앙에 진지한 단계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오관의 감각적 지각에 좌우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본질 직관’도 엄밀하게 말하면 심안 단계입니다. 지혜를 찾는 헬라인의 철학적 지성이 십자가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세계에서 셋째 단계는 마침내 영안이 눈 뜨이는 단계입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말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영계를 꿰뚫어보는 신비가의 신통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영안이란, 육신을 입고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분, 갈릴리의 목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화육된 것을 보는 눈,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보는 눈이 열림을 말합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십자가에서 달린 그 분만이 진정한 메시야’임을 보는 눈이 열림을 의미합니다. 상식적인 육안으로 보면, 치욕과 저주의 징표 밖에 안 되는
십자가가 달리 보인다는 말입니다.
윤리적 또는 철학적 심안으로 보면, 형장 책임자였던 로마 군대 백부장의 솔직한 말처럼, “아까운 의인 한 분이, 험한 세상 속에서 바른 소리하고 정의를 실천하다가 죽임당한 숭고한 사례”로 보이는 단계입니다. 백부장이나 니고데모의 ‘마음의 눈’은 진지하고 정직하고 성실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 단계를 넘어서고라야 비로소 열립니다.


정말 영안이 열린다면
그렇다면 영안이 열리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에야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는 눈이 아니라, 십자가 그 위에서 땀과 피로 얼룩진 가시면류관을 쓰신 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신앙을 말 합니다. 영안이 열린 신앙이란, 땅 위에 묻힌 하늘을 보는 자요, 사람과 작은 들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린 자입니다. 특히 고통하고 신음하는 생명체 안에서, 저 미디안 광야 불타던 떨기나무의 모세 체험처럼, 긍휼과 정의로움이 사랑의 아픔과 열정의 광휘로서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영안이 열린 신앙이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과거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보고 몸으로 듣는 자리에 이른 신앙을 의미합니다.
영안이 열린 신앙은 종교에 있어서 “의문(儀文)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바울의 말씀에 공감하여, 신앙생활을 바람처럼, 햇빛처럼, 불꽃처럼 매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안단계의 신앙이란, 우리 몸속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로서 놔두신 질병이나 시련이나 가난이나 의인의 고통을, 비록 감당하기 쉽지 않을지라도, 그것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은혜의 도구라고 감사하게 받아드리는 역설적 눈 뜨임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러한 영안이 열리는 신앙단계에서 종교와 예술은 하나로 입마추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거나 타고서 자기를 표현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먼저 간 이들과 지금 살고 있는 자들과 미래에 태어날 생명들, 그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있는 우주적 생명공동체의 한 식구임을 깨닫고 보는 눈이 열리는 사람들의 신학을 일컬어 ‘예술 신학’이라
합니다.
우리시대에 이런 영안이 열린 한 신학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성탄의 계절에, 우리도 그 영안이 열리는 은혜 입기를 기원합니다.
(2002.11,23. 연세대 루스채플/ 素琴선생 80세
생신맞이 감사 출판기념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