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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사상

성서와문화 2009.12.28 15:42 조회 수 : 1947

 
[ 작성자 : 이광호 - 연세대 철학과 교수, 철학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4)은 유형원(柳馨遠, 1622-1673)으로부터 시작되어 경세치용학과 북학사상과 실사구시학으로 크게 구별되는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조 후기의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유학 특히 조선조의 성리학적 풍토에서 성장하였지만, 그의 가계와 학맥을 통하여 전수된 서학사상 -과학사상과 천주교사상- 과 관련된 많은 서적들을 일찍부터 읽었다.
서양의 종교사상과 과학사상은 비교적 일찍부터 조선에 소개되었다. 마테오리치(1552-1610)가 1603년「천주실의」를 출판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수광(李수光, 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어우야담」에서 그 내용을 소개하였다. 선조(재위 1568-1608) 때 서양사상이 수입되기 시작하여 인조(재위 1623-1649) 때에 이미 서양 역법에 의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서학의 수입 속도는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서양 서적은 선조 말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름 난 고관이나 큰 학자들 가운데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제자백가나 도교 또는 불교의 서적과 같이 여기고 서재에 비치해 두고서 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할만하다. 그러나 서학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과 그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성호 자신은 「천주실의발」 「직방외기」 등을 지어 서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서학을 중심으로 서학을 신봉하는 신서파와 비판하는 공서파로 나누어졌다. 신서파의 대표적 인물은 권철신(權哲身,1736-1801),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정약종(丁若鐘, 1760-1801), 이벽(李蘗, 1754-1786)
등이다. 권철신과 이가환은 다산이 존경하는 스승이며, 이승훈은 다산의 매부이고 정약전과 정약종은 다산의 형이며, 이벽은 다산이 존경하는 선배였다. 학문을 좋아해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자들을 양성하며 덕정을 시행하려고 노력한 정조(재위 1777-1800) 재위 기간 동안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 10년 이상 머물렀다. 다산은 규장각에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의 북학파 학자들과 친교를 맺으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의 북학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다. 정조의 급작스런 사망 이후 신유년(1801)의 천주교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신서파의 학자들은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한 때 천주교 신자였던 다산도 이 때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강진으로 옮겨져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육경 사서에 대한 재해석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수백 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주의적 사상을 후세에 전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육경 사서로써 수신을 하고, 일표와 이서로써 천하국가를 다스린다”고 하였다. 유학의 기본 정신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니 그의 학문적 이념은 유학에 있었다. 그는 유학의 이념에 충실한 학자로서 위로 요(堯), 순(舜),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도를 천하에 실현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다산이 재해석한 유학의 이념 가운데는 기독교의 영향이 크게 반영되었다. 그의 상제관과 귀신관은 천주교의 관점과 유사하며, 사물관과 理氣觀은 마테오리치의 「天主實義」에 나오는 관점과 아주 유사하다. 다산은 유학자로서 서학사상을 만나 동양사상과 서양사 상의 만남의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두 사상의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다산의 위대성은 기독교적 정신의 영향에 바탕하여 유학정신을 재해석하였다는 점에 있다.
마테오리치는 천주교의 교리를 유교문화권에 가르치기 위하여 유교의 상제는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과 같다고 하며 유교의 도덕정신에 기초하여 성경의 교리를 해석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들 특히 성호학파의 학자들 중의 다수는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아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다산은 이들과 친교를 맺고 또한 영향을 받아 성리학의 이기론적 존재론을 부정하고, 우주와 인간의 삶을 상제를 중심에 두고서 재해석하였다. 특히 인간은 상제로부터 영명성(靈明性)을 부여받아 자연 및 자연 가운데 있는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하늘에서 받은 영명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질, 즉 선에 대한 기호(嗜好)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성리학에서 본체론적 진리관에 기초하여 그토록 중시한 성(性)을 다산은 ‘기호’라고 해석하였다. 인간에게 영명의 기호가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되게 하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 영명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윤리적 삶을 살 수 있음과 동시에 상제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다산의 도덕이
내면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유학의 최고 덕목인 인(仁)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본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 사이의 사랑이 곧 인이라고 해석하였다. 인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던 성리학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천적 사랑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 다산은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남에게 미루어 나아가는 서(恕)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서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산은 공자의 사상을 ‘서’ 한 글자로 관통한다고 보았으며 한편 ‘서’는 인을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다산은 심신이원론자로서 마음에는 마음의 기호가 있고 몸에는 몸의 기호가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기호 때문인데 마음이 선을 좋아하게 된 것은 마음 가운데 상제가 준 영명(靈明)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상제는 인간의 영명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항상 감독하고 내려다본다고 생각하였다. 영명과 상제는 다산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핵심개념이다. 다산은 상제가 인간의 내면에서 영명을 통하여 감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혼자만 아는 은밀한 마음을 잘 살펴 상제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다산의 신독(愼獨) 사상이다.
다산은 「심경밀험」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리라고 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을 자연이 만물을 낳는 이치라고 새기는 것이며, 셋째는 중용의 용(庸)을 평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신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서를 실천하여 인을 구하고, 항상 오래도록 쉬지 않고 노력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된다.”고 하였다. 다산은 도덕의 실천과 하나님 섬기는 도리를 하나로 이해함으로써 유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이해하였다.
다산사상에서는 경학사상 이외에 자연과학과 경세학 분야도 중요하다. 다산은 자연에 대해서는 관찰과 종합과 검증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사물의 속성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세학의 분야에서는여전제(閭田制) 또는 정전 제(井田制)를 실시함으로써 농사 짓는 사람이 토지를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며 모든 인민이 노동에 종사해야 된다고 하였다. 한편 전통적 유학의 민본주의를 넘어 통치자와 인민의 관계에 대한 관점도 새롭게 정립하였다. 인민을 정치의 객체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로서 인정함으로써 인민에게 통치자를 추대하고
갈아치울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