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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아시아의 문화 - 일본의 세 작가를 중심으로

성서와문화 2009.12.28 15:39 조회 수 : 1441

 
[ 작성자 : 다께나까 마사오 - 日本 同志社大學 명예교수, 신학 ]

아시아는 오랜 옛부터 전해 온 풍부한 문화의 전통이 있다. 유네스코 표어 중에 “기술은 보편적이지만 문화는 지방적이다.” (Technology is universal, culture is local.)라는 말이 있다. 문화(culture)라는 말은 경작한다는 말에서 왔으며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장(場)을 깊이 파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종교적 의식을 “cult’라 말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존재의 근저를 파내려 가는 경험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아시아의 기독자들이 자기가 놓여있는 생활의 장을 깊이 파내려 가서 그 깊은 맛에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말해서 기독교는 서구라파 세계를 거쳐서 아시아에 전해졌다. 16세기의 로마 카톨릭교의 포교활동이나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파의 선교활동은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형성에 큰 영향을 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박해를 받으며 복음을 전한 선인들의 발자취를 소중히 여기며 그 유산을 계승함과 더불어 각기 처해 있는 아시아의 토양을 깊이 파내려 가서 거기에서 체득 되는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만남을 주목해 갔으면 한다. 이 글에서는 구체적인 세 작가의 경우를 들어 고찰 하고자한다.
첫째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엔도슈사꾸(遠藤周作.1923-1995) 이다.
필자는 근년에 사회정기의 수법(method of social biography)을 사용하여 기독자의 삶의 형태를 음미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검색 점은 무엇이 그 사람의 원점(原點)인가 하는 것이다. 원점이란 그 사람의 생애의 기점(基点)이 되고 있는 결정적인 경험을 말하며, 평소에는 별로 의식되지 않지만 일단 무슨 일이 생길 때는 거기로 돌아가서 생각하려는 원체험(原體驗)을 말한다.
말하자면 필자에게 있어서 원체험은 1945년 8월 15일의 일본의 폐전 체험이다.
엔도 슈사꾸에 있어서는 두 개의 원체험이 있다. 하나는 1934년 11세 때에 세례를 받은 사실, 그리고 또 하나는 1950-51년에 걸친 불란서 유학 체험이다.
엔도 슈사꾸의 세례는 유아세례였다. 그것은 그의 모친의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시이나 린죠(椎名麟三)나 야요 세이이찌(矢代淨一)처럼 자기의 사상적 변천의 결로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하고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양육되었다. 엔도에게 어서 어머니는 큰 존재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신앙하는 리스도교를 그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의 제작활동의 요한 테마는 어머니에 의하여 억지로 입혀진 기독교를 기 몸에 맞추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평생 동안 지 않으면 안 될 테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마란 나에게 있어서 거리감이 있는 기독교를 어떻게 면 몸에 맞는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하면 그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입혀준 양복을 한 번 더
내 손으로 뜯어 고쳐서 일본인인 나의 몸에 맞는 일본 옷(和服)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엔도 슈사꾸의 또 하나의 원체험인 유학체험에서 “하얀사람”, “황색인” 등의 초기 작품이 쓰여졌으며 기서는 이질적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인하고 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일본의 토양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의 생애”(1973), “그리스도의 탄생” 등의 작품으로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엔도가 말하는 억지로 입혀진 양복이 아니고 자기 몸에 맞는 일본 옷인 기독교에서 어떠한 기독교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인가. 지면 관계상 요약해서 말하자면 “동반자 예수”, “약한 예수”, “어머니인 하나님“,그리고 ”깊은 강“과 같은 이미지이다.
둘째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민예적(民藝的)인 형염판화가
(型染版畵家- paperstensil print maker) 와데나베 데이유(渡邊楨雄 .1913-1996)의 경우이다. 그는 오끼나와 지방에서 옛부터 전해오는 형염(型染)의 수법을 세리사와에게서 배워 성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이웃에 사는 여교사에 이끌리어 교회에 가게 되었다. 그 때 그는 두 가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하나는 교회 분위기가 버터 냄새가 짙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교회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인상이었다. 그는 거기서 성서를 배우고 1930년 17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마치 이콘(Icon) 작가들이 기도와 묵상 가운데 작업에 임하듯이 그는 제작에 앞서 성서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풀이 하여 읽고, 거기서 작품에 구도가 떠오를 때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서를 일관되게 숙독하는데 그의 작품의 특색이 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1967년 작품 “태양을 벗어나는 천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묵시록의 다음 성구를 읽고 얻은 이미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이 도장을 찍을 때 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아라”하고 외쳤습니다. (요한묵시록 7:3)
공해문제에 촉발되어 환경에 대한 책임이 중시되는 오늘날이 성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우선한 1960년대에 이 성구를 정면으로 다루어 대지와 바다와 나무의 보존을 말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 작품은 예언자적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로써 성서를 매일 직접 읽고 제작에 임하는 그의 일상적인 습관의 소산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사회 상황 속에서 기독자로서 제작에 임하는 다나까 다다오(田中忠雄 .1903-1995)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나까 다다오의 아버지 도모우(兎毛)는 동지사 대학을 나온 목사로서 북해도 개척전도에 헌신한 사람이다. 다다오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화가가 되어서 성서의 소재를 직접 다루는 경우는 없었다. 전쟁 전의 그의 작품은 자연의 풍물이나 인물, 특별히 노동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그 중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