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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인생의 단계

성서와문화 2009.12.28 15:39 조회 수 : 1402

 
[ 작성자 : 유동식 - 신학 ]

인생에는 두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불만과 불평 속에 사는 인생이다. 불만이란 채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실보다 바라는 것이 더 크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욕심이 크면 클수록 불만은 더해 간다.
불평이란 평등하지 않다는 뜻이다. 많고 잘사는 사람에 비해서 자기는 적고 못산다고 생각하는 데서 불평이 나온다. 항상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저울질하는 인생이다. 거기에는 주체적인 자아가 없다. 불만과 불평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또 하나의 인생유형은 주어진 삶을 고맙게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세상에 온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없다. 먹고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디모데 전서 6:7-8) 그들은 옆 사람들과 비교해서 행복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절대적 가치와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주어진 삶을 항상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감사에는 몇 가지 차원을 달리하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생존적 가치 차원에서 감사하는 단계이다. 그 전형적인 것이 추수감사의 축제이다. 너희가 밭의 곡식들을 다 걷어드리거든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감사의 축제를 올리라는 것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분부였다. (레위기 23:39) 우리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먹고 입어야 산다. 그런데 그 먹고 입을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추수가 끝나면 하나님에게 감사의 축제를 올려야한다. 말하자면 생존적 가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원의 감사와 축제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 민족도 예로부터 영고니 무천이니 해서 항상 시월이면 며칠씩 음식을 먹고 마시며 춤과 노래로써 하나님에게 추수감사의 축제를 올리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그 전통이 오늘날의 추석 명절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사람들도 11월에는 추수감사절을 요란하게 지키고 있다.
둘째는 인격적 가치 차원에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단계이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전했다. “이레 동안 너희는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 이렇게 하여야 너희의 자손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레위기 23:42-43)
진정한 추수감사의 배후에는 그들이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역사적 사실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 사는 것만으로써 인간이 될 수가 없다.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고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다. 자유를 누리며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인격 회복을 위해 유대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하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 가치 회복에 대한 감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추수감사 축제는 참 축제가 될 수 있었다. 축제는 문화적 현상이다. 문화는 인간만이 창출하는 가치의 세계이다. 인간의 본질은 먹고 입고 사는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문화를 창출하는 인격성에 있다. 이러한 인격자가 되었을 때에 주어지는 생존적 가치의 세계는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추석이 진정한 추수감사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8.15 해방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자유도 인격도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있으면서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축제를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8월 15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음력 8월 15일은 추석이요, 양력 8월 15일은 해방절이다. 자연과 역사가 8월 15일에서 만나는 놀라운 문화적 시점이다. 실로 우리의 감사와 축제는 8.15에서 출발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감사하는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그것은 영적인 가치 차원의 단계이다. 그것은 육적인 차원을 넘어선 세계의 일이다. 자연과 역사가 인간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육적인 인간성의 차원의 일이다. 영적인 종교는 이러한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도록 가르친다.
육적인 세계에서의 감사의 척도는 많고 적고, 높고 낮고,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에 좌우된다. 많으면 감사하고 적으면 불안하다. 그러나 영적인 종교는 이러한 상대적 척도를 넘어서서 감사하도록 가르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 16-18) 는 것이 영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높은 산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 곳이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들어있다.
하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며, 나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리라.” (요한 14:20)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것은 마치 삼태극의 그림과도 같다. 셋이면서 하나이다. 이것은 인격적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변화한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이 세상의 상대적인 가치가 우리들의 행복을 좌우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모신 임마뉴엘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또 하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과 이 세상에 얽매여 있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써 무아(無我)가 된다는 뜻이다. 무아의 인간은 욕심이 없는 빈 마음의 사람이다. 따라서 주어지는 모든 삶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본시 없었던 나(무아)에게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다. 부활이란 새로운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영적인 부활의 세계는 육적인 이 세상의 가치의 세계를 넘어서 있다. 오히려 이 세상적인 가치의 세계를 쓰레기와 같이여기게 한다. (빌립보 3:8)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삶의 기쁨,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감사를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삶 곧 범사(凡事)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