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2년 성서와 문화

빛은 어둠에서

성서와문화 2009.12.28 15:36 조회 수 : 1555

 
[ 작성자 : 이혜진 - 도예가 ]

우리가족은 1993년 오월, 5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마무리하고, 이곳 미리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매일 똑같은 미국에서의 생활은 건조한 사막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고국의 산과 들에 내 몸을 눕히고 우리 땅의 흙냄새를 마음껏 들여 마시며 살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미리내에서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공기와 맑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면 정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기쁨과 감사로 가슴이 벅차왔다.
작업장이라고 해야 훵하니 한쪽 벽만 있을 뿐, 출입문도 창문도 없는 맨 땅바닥에 기둥만 있는 스레트 지붕의 허술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작업장이었다.
촉촉한 흙이 주는 기쁨과 평안함 속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신바람이나, 어깨춤을 추어가며 흙 반죽을 하고, 이 모양 저 모양을 만들다 보면 흙과 혼연일체가 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땀범벅이 되어 하루해를 보내곤 했다.

 

어느덧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무들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황금 물결치던 벼와 김장 무 배추 위에 찬이슬이 맺히더니 어느 날 갑자기 서리가 내렸다. 생전 처음 맞는 시골의 겨울이라 이렇게 빨리 추위가 닥칠 줄은 미쳐 몰랐다.
창문도 출입문도 달지 못한 작업장에는 차디찬 바람이 스치곤 했다. 빚어 놓은 도자기들이 추위에 상할까봐 몇 겹씩 비닐로 정성스럽게 싸놓았는데, 첫 추위가 닥치던 날 그 모든 것이 얼어 버렸다. 그리곤 한낮에 기온이 올라가자 다시 녹으며 갈라지고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이사하느라 쓴 여러 비용들과 이곳에서의 생활비 등으로 지갑에는 동전 몇 닢 남지 않은 힘든 형편이었다.
미국에 그대로 살자는 식구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돌아 왔는데, 막상 생계가 막막해지고 보니 식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즈음, 서울에서 친구가 한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다. 친구는 나의 시골 생활과 근황을 이것저것 묻고는 당장 필요한 것들을 선뜻 구입해 주었다.
작업장 창문틀 위를 비닐로 밀폐시키는 도배를 하고, 피어놓은 연탄난로의 온기가 돌자, 작업장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고 나의 몸과 마음 또한 따듯하게 덥혀졌다.

 

그 춥고 어둡던 겨울 이후, 나는 어둠을 밝히는 촛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을 때, 삶의 용기와 희망의 빛을 선사한 친구처럼 나도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이 되고 싶어서였다. 친구의 따듯한 배려는 내 마음 속에 아름다운 빛으로 살아 있다. 이 빛이 나의 삶과 작품 속에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빛은 어둠에서.....”